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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 스타킹 Sep 05. 2020

장 자크 루소 <에밀> 그리고 Be Yourself

자녀 양육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외국에서 홀로 아이를 키운다는 것, 그것은 나침반과 지도 없이 떠나는 여행길과 같았다. 심지어 그 길은 끝도 없어 보였고 목적지 좌표는 이리저리 움직였다. 하지만 목표가 어디인지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누구에게 물을 수도 없었다. 물론 아이를 키우는 기쁨과 즐거움도 있지만 때로는 답답하고 마음이 먹먹했다. 위로받고 싶을 때 무작정 아이를 안고 찾아갔던 엄마는 너무 멀리 있었고 직장과 육아의 험난한 길을 함께 했던 친구는 만날 수 없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할 아이만 곁에 있었다.

이런저런 육아서를 들춰가며 하루는 이렇게 또 다른 하루는 저렇게 막연히 아이를 키웠다. 다행히 아이는 별 탈 없이 자랐고 나는 책에서 가르쳐준 매뉴얼과 함께 나의 생각, 행동 그리고 언어를 아이에게 먹였다.  

그즈음 우연히 장 자크 루소의 '에밀 또는 교육 (EMILE ou DE L'Education)'을 읽게 되었다. 대학시절 교육학 수업에서 참고도서로 요약본만 접했던 책이다. '사회 계약론'의 저자이자 계몽주의 철학자 루소가 교육학 책도 썼구나’하는 것 말고는 특별한 기억도 없었다. 어떤 계기였는지 아무튼 그 책의 첫 장을 펼쳐 들었다. 그런데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이가 잠들면 밤부터 새벽까지 줄을 쳐가며 읽어 내려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고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한줄기 '구원'의 빛을 보았다. 육아의 가시밭 길에서 ‘복음'을 만난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아이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설명하고 가르치고 읽고 쓰게 할 때였다. 더 많은 것을 가르치고 더 많은 것을 설명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을 받아들이거나 어려운 문제를 풀어내면 '내가 잘 키우고 있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를 위해 항상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은 의무감이었을 뿐 즐겁지 않았다.

그런데 루소가 말하는 부모의 역할은 너무도 간단했다. 아이가 타고난 본성(Naturally Born)을 충분히 발현하도록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부모는 어떤 인위적 간섭과 통제도 금하라. 아이가 자연과 사물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게 하라. 모든 것을 스스로 깨닫도록 하라.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을 설명하지 말라.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책은 읽히지 말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외부의 그 무엇을 주입하지 말라. 아이 내면의 모습을 충분히 끌어내 발산하도록 해라. 나머지는 시간과 자연과 사물에 맡겨라'. 이렇게 쉬운 육아법이 있었다니! 그간의 내 노력은 빛을 잃었지만 알 수 없는 해방감이 찾아왔다.

그 후로 육아서 읽기를 멈추었고 아이를 향한 나의 영향을 가능한 최소화 했다. 아이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보다 무엇을 하지 말 것인가에 집중했다. 그저 아이가 아이 자신(Be Yourself)이 되기를 지켜보기로 했다. 물론 마음처럼 되지 않는 때가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에밀'을 떠올리며 회개(?)했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 만든 육아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유함을 얻었다. 복음은 땅 끝까지 전하는 법. 그 후로 육아로 고민하는 누군가를 만나면 전도하듯 복음을 전하고 이 책을 손에 쥐어 주었다. 그리고 'Don't judge the book by it's cover'를 언급하며 이 책에 대한 편견을 버리게 했다. 나도 책을 읽기 전에는 계몽주의 철학자가 난해한 용어로 거대 담론을 들먹이는 교육 이론서를 떠올렸다.

하지만 이 책은 너무나 현실적이고 섬세하며 심지어 흥미롭고 박진감 넘친다. ‘에밀'이라는 가상의 남자아이를 등장시켜 출생 직후 유아기부터, 유년기, 청소년기, 청년기에 걸쳐 소피아라는 여성을 만나 결혼하기 직전까지 '아들 키우기'의 모든 과정이 담긴 생생한 육아 실용서였다.

심지어 우는 아이, 겁 많은 아이, 고집 센 아이, 잘난 척하는 아이, 협동할 줄 모르는 아이를 대하는 법, 연령에 맞는 적절한 장난감, 놀이, 취미, 운동, 옷차림부터 사춘기 연애법, 유용한 직업 선정까지. 육아는 저 세상 이야기 일 것만 같은 한 남자가 썼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1762년 발행된 이 책은 사실 출간 당시 많은 비판을 받았다. 당시 귀족들의 반감을 살 만한 그리고 일반적인 생각과 반하는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루소는 가정형편을 이유로 자신의 아이들은 고아원에 맡겨놓고 귀족 자제 가정교사를 한 것이 양육과 교육 경험의 전부였다. 부모 역할은 해 본 적도 없고 현실도 모르면서 이런 책을 썼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루소가 ‘에밀’에서 주장하는 바가 옳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나는 ‘어떻게 지금의 내가 되었는가, 어떻게 내 아이를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게 할 것인가’ 생각하게 되었다. 에밀은 그렇게 나의 ‘바이블’이 되었고 나는 자연과 사물과 시간에 아이를 맡기고 게으른 엄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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