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일상
학교에서 돌아온 막내가 뜬금없이 묻는다. “엄마! 세상에서 어느 나라가 가장 힘이 쎄요?”, “응? 힘? 그게... 글쎄 뭐라고 해야 하나. 그 힘이 세다는 게 그러니까 말이지.... 그 나라 사람이 정말 물리적으로 몸짱이고 힘이 세다는 건지, 다른 나라랑 전쟁을 하면 이길 수 있어서 세다는 건지, 아니면 우주탐사, 인공지능 로봇처럼 세상에 없던 일을 해내고 만들어내서 세다는 건지, 소수자 차별 없고, 소외된 사람이 없고, 굶주린 사람이 없어서 세다는 건지, 경쟁하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어서 세다는 건지....”
“엄마! 그래서 누가 젤 쎄냐고요?"
미국!이라는 가장 간단한 답이 있는데 나는 왜 또 답을 찾아 헤매는 건지. '미국이 세상에서 가장 센 나라가 맞음!'이 맞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막내 같은 반 친구 중에 중국 아이가 있다. 어떤 맥락에서였는지 '중국이 세상에서 제일 쎄!' 했다는 거다. 우리 집 막내의 세계관은 'OOO에서 보물찾기 시리즈'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마음은 '아니야! 한국이 제일 쎼!'라고 하고 싶었지만 자칭 또래의 식자층으로서 그런 억지를 부리고 싶지는 않았나 보다. 자기가 읽은 책에 의하면 러시아가 제일 센 나라였다. 아이는 아직 '미국에서 보물찾기' 편을 읽지 못했다.
결론이 나지 않은 채로 막내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는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학교로 돌아가 다시 논쟁을 이어가고 싶었던 것이다. 이럴 땐 근거 있는 확신이 필요한데 이 엄마는 근거도 확신도 빈약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다. 세계 정치와 권력다툼이 집안 일보다 더 중요한 남편이 출장길에 오르지만 않았어도 충분히 근거도 있고 확신에도 찬 답을 들을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아이는 답을 주지 않는 엄마를 답답해하며 저녁나절을 보내야 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못 참는 남편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막내는 잠자리에 누워서도 잠 못 드는 밤을 보내고 있었다. “세상에서 어느 나라가 가장 쎄냐고요?”
이 질문이 내 수면보다 중요할 일은 아니다. 고민 없이 해치우자. 나의 수면을 지켜낼 방법을 찾자! 구글 검색창을 띄우고 '세계에서 가장 센 나라는?'이라고 썼다. 아이 눈 앞에 화면이 펼쳐진다. “구글이 미국이라네! 됐지? 이제 자자! 끝!”
끝냈다고 끝이 아니다. 자기 지식으로는 러시아가 제일 센 나라인데 왜 어째서 미국이 젤 센 나라가 되었냐고 묻는다. 나는 도대체 언제쯤 잘 수 있는 것인가? 이럴 땐 남편이 흑기사로 등장해 주었으면 좋으련만. 그는 현재 한국에서 자가격리 중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 와중에도 '자유란 무엇인가? 세계 정치는 어느 길목에 있는가? 한국과 영국의 교육 철학은 어떻게 다른가?' 이런 걸 고민하느라 꿈속에서라도 우리를 찾아올 틈이 없을 것이다.
그래.... 너에게는 엄마의 수면보다 중요한 일이지. 아이에게 대물림된 이기적 유전자를 탓했지만 동시에 자칭 체제이념 전문가 남편의 부재가 아쉬웠다.
'OOO에서 보물찾기'보다 훨씬 못 미치는 수준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뭔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해서 설명해야 할 것 같았다. 맥락은 '너와 형 그리고 빵'이었다. “너는 빵 5개를, 형은 15개 구웠어. 공산주의는 엄마가 그걸 다 가져간 다음 너와 형에게 똑같이 10개씩 나누어 주는 거야. 자본주의는 형은 자기가 만든 15개를 다 갖는 거고, 너는 네가 만든 5개만 갖는 거야”라고 참 빈약하게 설명했다.
아이는 “그럼 공산주의가 더 페어(Fair) 한 거네!”한다. 아이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 아무튼 아이가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공산주의가 왜 작동하지 않았는지 소련이 결국 왜 해체되었는지 더 빈약한 설명을 하고서야 나는 잠을 잘 수 있었다.
주말을 맞아 둘째 아이가 브런치를 준비했다. 덕분에 우리는 침대에서 충분히 늦잠을 잤다. 형이 차린 성대한 식탁 앞에서 막내는 “역시, 난 페어 한 공산주의가 좋아!”
두 형이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요리는 형이 혼자 다 했는데 우리 모두 똑같이 먹게 되잖아!” “엥? 그럼 공산주의 반대는 뭔데?” 큰형이 물었다. “아... 그거... 뭐더라... 아! 자뻑 주의!!”, “뭐? 무슨 주의?”, “그거 있잖아. 혼자 다 먹는 거. 자기가 잘났으면 다 내 것이라고 하는 거. 그거 자뻑 주의 말이야. 미국이 자뻑 주의래.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세졌데!”
헉! 나는 그렇게 설명한 적이 없다.
때마침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존 책 배달이다. 큰 아이가 말한다. “미국 자뻑 주의 승자, 아마존이다!” 따끈따끈한 신간이다. 주문 하루 만에 약속대로 도착했다. 제목도 절묘하다. 버락 오바마의 자서전 ‘약속의(된?) 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