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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 스타킹 Nov 26. 2020

영국 코로나와 크리스마스 버블

영국 사회




다음 주면 한 달간 계속되었던 영국의 2차 코로나 럭다운이 끝난다. 이 기간 동안 원칙적으로는 다른 가족과 만날 수 없다. 그래도 학교는 정상 운영인지라 막내 아이 등하교 길에서 동네 사람들과 학교 학부모들을 스치듯이 만난다. 서로 안부를 주고 받으면 한결같이 묻는 것이 크리스마스 계획이다.


영국 사람들은 계획을 좋아한다. 아니 좋아한다기보다는 일상이다. 크리스마스 계획은 물론이고 휴가, 공연 관람, 쇼핑, 친척 방문 등, 보통 6개월에서 1년 전에 계획을 세운다. 다양한 변수의 삶이 일상인 나로서는 무계획이 계획이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이렇게 미리 계획을 세우나 싶기도 하다.


계획이 일상이고 일상이 계획인 이곳 사람들도 올해는 무계획이 계획인 뉴노멀을 경험했다. 3주 단위로 바뀌는 정부의 코로나 규제 발표로 일 년은 고사하고 한 달 전 계획도 미리 세울 수 없었으니 말이다. 드디어 어제 크리스마스 때 적용될 코로나 규제 방침이 발표되었다. 영국 사람들이 코로나 백신보다 더 기다리던 소식이다.


12월 23일부터 27일, 5일 동안 최대 세 가구까지 함께 모일 수 있는 일명 '크리스마스 버블(Christmas Bubble)'을 발표했다. 이 버블에 속하면 세 가구가 한 가족처럼 서로의 집을 오가며 자유롭게 만날 수 있다. 나는 이 버블이라는 말이 듣기 좋은데 사람들이 커다란 테이블에 둘러앉아 둥근 버블 안에서 정답게 이야기하며 둥둥 떠다니며 모습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 영국 코로나 크리스마스 버블 규제 방침 >


이번 럭다운 기간에 또 다른 버블이 있었다. 하나는 서포트 버블(Support Bubble), 다른 하나는 췰드런 버블(Children Bubble)이다. 서포트 버블은 한부모 가정에 18세 미만 미성년 자녀가 있거나 1인 가구일 경우 다른 가족과 버블이 되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췰드런 버블은 부모가 모두 있어도 자녀가 14세 미만이면 다른 가족과 만날 수 있다.


이 버블 규칙을 만든 정부 관계자에게서 인간미가 느껴진다. 한부모 가정에서 아이를 홀로 돌보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취약 계층의 독신자나 독거노인이 아무도 만날 수 없다는 게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지, 어린아이들이 이웃과 친구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나는 일시적 한부모이고 14세 미만의 아이들이 있어서 이 두 가지 버블에 모두 해당되었다.


동네에서 친하게 지내는 카테리나, 둘째 아이 친구 엄마 루스, 셋째 아이 친구 아빠 로버트가 내가 일시적 싱글맘이 된 걸 알고 있었다. 카테리나는 DIY (Do It Yourself) 필요하면 알려달라고 했다. 집 안팎으로 해야 할 일 있으면 남편 데이빗을 보내겠다는 거다. 루스는 자기가 서포트 버블이 되어주겠다고 했다.


나는 다행히 큰 어려움이 없었고 어떻게든 혼자 해결해 보자는 마음에 나의 버블 멤버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고 일주일을 보냈다. 영국 사람들은 언제나 도울 준비 'Ready to Help'를 하고 있지만 상대방이 원하지 않으면 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조심스러워한다.



어느 날 분리수거 재활용품을 버리려고 문을 열고 나가는데 데이빗이 우리 집 앞을 기웃거리고 있는 거다. 반가운 인사를 하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카테리나가 내가 연락이 없으니 혹시 무슨 일이 있나 도울 것은 없나 가보라고 했단다. 소위 탐색을 나온 거다. 문은 두드리지 않고 집 앞을 서성이며 인기척만 기다린 그가 고맙기도하고 우습기도 했다. 데이빗은 우리의 안부를 묻고 동네 소식 몇 가지를 전해주고 필요한 일이 있으면 꼭 연락하라는 말을 남기고 발길을 돌렸다.


루스는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며 메시지를 보내왔다. 아직까지는 지낼만하다고 답하니 별일 없으면 주말에 공원에서 만나자고 했다. 공원에 가보니 루스는 배드민턴 장비, 탁구 장비, 쿠키까지 구워서 한 짐을 들고 남편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내가 혼자 아이들 돌보는 게 힘들까 봐 거리두기가 가능한 운동기구며 간식 그리고 일일 아빠 역할을 해 줄 남편까지 데리고 나온 거다.


로버트는 아이와 함께 기차를 타고 등하교를 한다. 우리 집과 학교 중간 지점에 기차역이 있어 오고 가는 길에 자주 만나게 된다. 학교가 끝나면 아이들은 집에 갈 생각은 않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동네 언덕이며 숲을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로버트는 기차 시간 때문에 계속 시계를 들여다보지만 자유로운 영혼들은 한 없이 놀려고만 한다. 그래도 보통 15분 이상은 허락하지 않는데 요즘은 30분 이상 놀게 해 준다. 일시적 싱글맘인 나와 우리 아이를 배려해조금 더 놀 수 있도록 다음 기차를 타는 것이다.


아이들을 기다리면서 로버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데 오늘은 나에게 영국 살기가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다들 힘들다는 영국 날씨도 내가 살던 곳에 비하면 너무 온화해서 좋고 사람들은 날씨보다 더 좋아서 아주 만족한다고 했다. 내가 운이 좋은 거라며 영국에 나쁜 사람도 많다고 했다. 내가 운이 좋은 것일 수도 있고 팬데믹 상황에 럭다운까지 이 험난한 현실을 부정하는 정신 승리일 수도 있다. 그래도 나를 살피고 도울 준비 되어 있는 이들과 버블 속에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무한긍정이 된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나의 아픈 친구 K에게도, 싱글맘을 선택한 사유리에게도, 외롭고 굶주린 모든 영혼들에게도 산타 할아버지가 크리스마스 버블을 선물해 주었으면 좋겠다. 사실 일회성 크리스마스 선물보다 제도적으로 사회적 안전장치가 작동하는 정부차원의 다양한 버블들이 만들어지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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