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런던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루 스타킹 Dec 02. 2020

지구가 하나의 마을이라면

영국 일상




지난 토요일 페이스북 메신저로 동영상 하나를 받았다. 하즈믹이 안부 인사도 없이 보내온 영상이다. ‘Worldwide Armenian Musician for Artsakh'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풀타임 가정주부인 나는 주말이 가장 바쁘다. 바로 영상을 확인할 여유는 없었지만 오랜만에 그녀의 소식이 반가웠다. '연주 축하해! 그리고 영상 고마워! 넌 여전히 멋지구나!' 우선 답글만 남겼다.


몸과 마음이 다른 일을 할 때가 있다. 하던 일을 계속하며 하즈믹을 생각했다. 그녀를 처음 만나건 10년 전 카자흐스탄이다. 큰아이 학교 등하교 시간 오가며 알게 된 음악 보조교사였다. 길고 가는 몸, 검고 긴 생머리, 커다랗고 깊은 눈. 야무진 인상이지만 그녀는 아이들보다 더 아이 같은 구석이 있었다. 멀리서 서로를 알아보면 두 손을 높이 들고 파도치듯 인사했다. 닿을만한 거리면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온몸으로 반겼다. 항상 밝은 그녀는 매일 아침 긍정 비타민을 먹고 나오는 것 같았다. 우울한 날도 신나는 목소리로 우울하다고 말했다. 스무 살을 갓 넘긴 그녀는 언제나 신이 나고 다정했다.


얼마 후 그녀는 우리 아이들의 바이올린 선생님이 되었고 서로의 집을 오가게 되었다. 레슨이 끝나면 함께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에 대해 알아갔다. 그녀가 아르메니아에서 나고 자랐다는 것, 영국 왕실 음악원 (Royal Academy of Music) 국비 장학생이었다는 것. 그곳에서 만난 남자 친구 아미르를 따라 카자흐스탄에 오게 되었다는 것. 바이올린 연주가로 영국에 남고 싶었지만 제3 국가 출신이 영국 음악계에 발을 들여놓기는 쉽지 않았다는 것. 다른 국가 출신보다 열 배 이상의 노력과 재능이 있어야 무대에 한번 설 수 있다는 것. 서른이 되기 전까지 계속 국제 콩쿠르에 도전해 볼 거라는 것. 콩쿠르에 입상하고 기회가 되면 영국으로 돌아가 살고 싶다는 것.


그리고 아르메니아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터키와 아제르바이잔 사이에 위치한 우리나라 1/3 크기의 작은 나라라는 것,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나라라는 것. (‘로마제국보다 먼저'라고 덧붙였는데 이 대목에서는 꽤나 자랑스러운 표정이었다. 우리 둘 다 변방에 살아서인지 세계 최초, 세계 최고 이런 말을 좋아했다). 오랫동안 오스만 제국(지금의 터키)과 러시아 제국의 분할 통치하에 있었다는 것, 20세기 초 오스만 제국에 의해 150만 명이 넘는 아르메니아인이 대량 학살되고 강제 이주되었다는 것. 이로 인해 아르메니아인들의 디아스포라가 시작되어 많은 사람들이 전 세계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는 것.


<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분쟁지역 / Artsakh >


터키는 물론 국제사회도 아르메니아 대량학살이나 강제이주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으로 세워진 구소련 연방국가 중 하나였다는 것. 소련 해체 후 독립국이 되었지만 여전히 러시아의 영향 하에 있다는 것. 이웃 나라 아제르바이잔은 터키의 지원을 받아 지속적으로 아르메니아를 공격한다는 것. 세계 강대국 대부분이 자국의 이익 따라 또는 터키가 견제 대상이 되는지의 여부에 따라 아르메니아 또는 아제르바이잔을 선택적으로 지지한다는 것.


밝고 활기찬 하즈믹이지만 아르메니아 이야기를 할 때는 자주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항상 희망적으로 자신의 내일을 이야기했다. 다음 세대는 평화로운 아르메니아에서 살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녀의 말은 들리고 보이고 느껴져서 내가 한 번쯤은 아르메니아에 가 본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고 그녀가 원하는 것은 모두 이루어질 것 같기도 했다.


서로에 대해 조금씩 더 알아가는 동안 하즈믹은 아미르와 약혼을 했고 얼마 후 둘은 부부가 되었다. 나는 결혼식에 가지 못했지만 한국에서 가져간 작은 복주머니에 축하 메시지와 축의금을 전했다. 그들은 피아노 바이올린 그리고 클라식 악보가 가득한 집에서 노란 카나리아 한 마리와 같이 살았다. 하즈믹은 연주회가 있는 날은 꼭 초대해 주었고 연주가 끝나면 나는 아이들과 함께 꽃다발을 들고 무대 뒤에서 그녀를 만났다.




주말의 일들을 대충 마무리하고 그녀가 보내준 동영상 앞에 앉았다. 하즈믹을 포함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아르메니아 출신 음악가들의 연주였다. 과거 아르메니아인 대학살과 같은 역사의 비극이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는 메시지도 담겨 있었다. 하즈믹의 답글도 달렸다. . '지금 우리나라는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녀의 연주회 영상이려니 하고 '축하한다'고 했던 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한 번쯤 가보았다고 생각되는 하즈믹의 나라. 아르메니아는 지금 아제르바이잔과의 전쟁으로 페허가 되어가고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영상을 다 보고 하즈믹과 댓글을 이어갔다.


나는 궁금한 것들을 짧게 묻고 하즈믹은 길게 대답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전쟁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사이에 위치한 Artsakh (Nagorno-Karabakh 지역)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이곳은 사실상 아르메니아인들이 살고 있는 독립 자치 공화국이지만 소련 해체 후 국제사회는 이곳을 아제르바이잔 영토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이 지역 아르메니아인들은 반발했고 이후 크고 작은 분쟁과 전쟁이 있었다고 했다.



최근 이슬람 정권이 들어선 터키는 아제르바이잔과 1국 2 체제라 할 만큼 긴밀한 관계인데 Artsaks 지역의 아르메니아 인종을 몰아내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을 지원, 전쟁을  선포하고 무차별 학살하고 있다는 거다.


국제사회는 Artsakh 전쟁이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단순한 영토분쟁으로 보도하지만 사실은 터키에 의한 제2의 아르메니아 인종청소가 될 것이라고 했다. 두 나라 모두 민간인이 죽어가고 끔찍하고 야만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인권단체들은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했다. Black Lives Matters에 쏟는 관심을 조금이라도 자신들에게도 보여달라고 했다. 나는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위로도 동정도 어울리지 않았다.


국제관계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전략적 우위에 서려고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21세기에 살고있다. 대량학살과 무력 전쟁말고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일까? 국가와 국익을 위한 민간인 학살은 멈춰야한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즈믹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록하는 일뿐이다.


문득 '지구가 하나의 마을이라면'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이웃이라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 Worldwide Armenian Musician for Artsakh

https://youtu.be/zv9 PDf4 drAQ

< 민간인 대량학살 반대를 위한 전 세계 아르메니아 출신 음악가들 >


@ We long to live : Artsakh 분쟁지역 아이들의 노래

https://youtu.be/JJeKatR1 BEU

< Artsakh 분쟁지역 아이들의 노래 'We long to live'>


매거진의 이전글 영국 코로나와 크리스마스 버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