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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런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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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 스타킹 Oct 29. 2020

김치 냉장고와 우월한 유전자

그와 나





바야흐로 김장의 계절이 다가온다. 외국 살면서 무슨 김장인가 싶겠지만 몇 해 전까지 해마다 김장을 했다. 물론 영국 아니고 카자흐스탄에서 말이다. 카자흐스탄 수도 아스타나는 한겨울이면 영하 40도까지 내려간다. 내가 살던 알마티는 남쪽 지방이라 그 정도는 아니지만 영하 20도는 기본이다. 눈이 내리면 허리까지 쌓일 때도 있다. 한겨울이 되면 배추는 물론 푸른 채소도 귀하다. 바깥출입도 삼가기 때문에 단단히 월동 준비를 해야 했다.


카자흐스탄 한국 교민은 2천 명도 안 되지만 고려인이 10만 명이나 되고 2세대까지는 한국음식을 먹고 김장도 한다. 고려인 수요가 있으니 대규모 배추 농사와 쌀농사를 업으로 하시는 분들도 많다. 덕분에 우리 같은 교민들도 한 겨울이 되기 전 한국 품종의 배추며 쌀을 구할 수 있었다. 이맘때면 카자흐인, 고려인 친구와 함께 김장을 하곤 했다.


< 카작 그리고 고려인 친구들과 함께한 김장 >


10년 넘게 카자흐스탄을 고향처럼 여기며 살다 몇 해 전 영국으로 터전을 옮겼다. 다들 영국 날씨가 안 좋다는데 몸조심하라며 우리를 배웅했다. 런던에 와보니 이렇게 좋은 날씨가 없다. 눈도 오지 않는 겨울은 춥지도 않았다. 사시사철 푸른 채소는 물론 뉴몰든 한인마트에는 늘 배추가 쌓여 있다. 그래서인지 3만 명이 넘는 한국 교민 사이에 김장 문화는 없다.


외국생활 15년이 다 되어가지만 우리 집은 여전히 홈 메이드 김치를 찾는다. 다른 살림은 대충 해도 내 손으로 담근 김치를 끊이지 않고 공급만 하면 식구들은 불만이 없다. 런던으로 이사한 첫날 짐도 풀기 전 가장 먼저 한 일도 동네 가게로 달려가 겨우 무 한 개와 배추 한 포기를 구해 눈곱만큼 김치를 담근 일이다.




한인마트에 배추가 넘쳐나도 김치 냉장고가 없으니 김장은커녕 몇 포기 담아도 보관이 여의치 않다. 허나 나는 현실 안주형, 탁월한 적응력의 소유자! 없으면 없는 대로 잘 산다. 게다가 미니멀 라이프 추구형이라 꼭 필요치 않으면 살림도 사지 않는다. 우리 집은 가구는 물론 부엌살림도 에어비앤비 수준이다. 나와는 달리 김치 애호가이자 살림살이 구입이 취미인 남편은 호시탐탐 김치 냉장고 구입을  노리고 있었다. 나는 예술품이라면 몰라도 가전제품을 또 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사계절 배추가 없는 것도 아니고 런던이 월동준비 할 만큼 추운 겨울도 아니니 말이다.


영국에서 김치 냉장고를 바로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한국에서 직접구매 후 컨테이너로 실어 오거나 몇 년에 한 번 판매업자가 대량으로 물건을 들여오면 선주문 후 구입한다. 최근 후자의 기회가 생겼는데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통해 물건을 보지도 않고 사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말린다고 들을 사람’도 아니지만 ‘안 그랬으면 좋겠다'는 내 의사는 표현했다.


지난주 남편은 누군가와 바쁘게 몇 번 통화를 했다. 며칠이 지나자 우리 집 앞에 커다란 트럭이 도착했다. 그는 신이 나서 달려 나갔고 동네 사람이 다 들릴 정도로 나를 불렀다. '자기야~어서 나와 봐! 자기를 위한 선물이 도착했어!' 항상 이런 식이다. 바비큐 그릴, 정수기, 녹즙기, 로봇청소기, 프라이팬, 커피잔까지 매번 이렇게 내 선물이 된다. 내가 갖고 싶은 물건, 받고 싶은 선물은 따로 있다.


< 짝퉁이 아니길 바라는 김치 냉장고 >


운전과 배달을 위해 두 사람이 왔다. 한 사람은 영국인, 다른 하나는 한국인이었다. 뉴몰든에서 여기까지 차가 막혀 늦었다며 나를 보고 미안해했다. 남편은 몰라도 나는 괜찮았다. 큰아이를 불러 운반을 돕게 했다. 늦은 게 미안했는지 도움이 고마왔는지 아이를 칭찬했다.


“키도 크고 체격도 좋고! 아~ 멋진 아들을 두셨네요. 이렇게 우월한 유전자는 여기서도 보기 드물어요." 좀 넘치는 칭찬이라 "아~ 네"하고만 답했다. "일제시대 우리 살던 데서는 이렇게 우월한 유전자들을 데려다 OO섬에 보냈지요. 그리고 일본 여자들을 배로 실어와 교배(?)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를 낳으면 일본 정부에서 평생 먹고 살 돈을 주고.... 이건 일급비밀이라 절대 발설하면 안 되는데. 아무튼 그래서 일본 놈들이 종자 개량된 겁니다."


“네????" "근데 일본이 패망하고 물러나면서 그 섬에 살던 그 우월한 유전자를 다 총으로 쏴 죽였지요! 한 사람이 살아남았는데 백두산으로 도망 와 숨어 살았죠. 근데 이 사람이 술만 먹으면 이 이야기를 다 하고 다녔지 뭡니까” 나는 잠시 멈칫하다가 바로 물었다. "저... 북한에서 오셨어요?" , " 아, 사모님 딱 아시네. 북한 사람 처음 보시오?". '아, 네..." 당혹감도 있었으나 신기했다.




난민 자격으로 영국에 들어온 600여 명의 탈북자가 뉴몰든을 중심으로 정착해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직접 만나 이야기한 것은 처음이다. 리정혁 동무도 생각나고 호기심도 발동해 괜히 무슨 말이라도 더 나누고 싶었다. 언제 영국에 오셨냐, 자녀는 있으시냐, 영국의 난민 대우는 어떠냐, 북한에서는 무슨 일을 하셨냐. 한국은 가보셨냐. 생각나는 대로 물었다.


영국에 온 지 10년이 넘었고 아이들은 모두 영국에서 대학까지 졸업하고 자리를 잡았고, 영국은 난민에게는 최고의 나라이며 북한에서는 군 고위 간부였다고 했다. 한국에서도 몇 년 살았다고 했다.


보안상(?) 모든 걸 다 공개할 수는 없지만 이어진 이야기는 더 흥미로왔다. 책 출간이나 유튜버를 해도 성공하겠다 싶어 권유했다. 본인은 북한에 가족이 있어 태영호 씨처럼 드러내 놓고 활동할 수 없다고 했다. 북한에 있는 가족들하고는 통화도 하고 중국인 브로커를 통해 생활비도 부족함 없이 보내주고 있다고.


김치 냉장고 자리를 잡아주고 그들은 떠났다. 원하던 물건을 손에 넣고 이레 저레 신났던 남편은 무엇이 마음에 걸렸는지 제품 설명서며 냉장고를 구석구석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이거 중국산 짝퉁 같아!”라며 허망해한다.


나는 비록 총살당한 '우월한 유전자'가 마음에 걸렸으나 아들 칭찬에 생생한 북한 이야기를 들었으니 짝퉁이어도 상관없다고 말해 주었다. 그걸로 이미 이 냉장고 값은 한 거라고. 남편은 아무래도 ‘이기적 유전자’에 속은 거 같다며 밤새 잠을 뒤척였다.


< 리처드 도킨슨의 이기적 유전자>


다음날 아침 나는 남편에게 ‘이기적 유전자’를 건네고 유럽 최대 한인타운 뉴몰든으로 배추를 사러 갔다. 한국에서 어머님이 보내주신 고춧가루로 김장을 한 가득해놓고 보니 김치 냉장고 사기를 정말 잘했다 싶다. 비로소 영국이 내 고향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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