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에 짐겨 있을 수 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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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죽은 자를 애도하는 시간에 내 삶의 이유를 묻는다.
지난해 늦은 가을, 내 삶에서 큰 사람이었던 사촌 언니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미국에 살고 있던 언니는 루게릭 병을 앓고 있었다. 가족들이 걱정할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언니가 몸에 이상을 느낀 건 치매가 있던 언니의 엄마를 3년 넘게 혼자 돌보고 난 후였다. 언니는 엄마의 장례 절차를 마친 후 집안 정리를 끝내고 나서야 자기 몸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루게릭 진단을 받은 건 그즈음이지만 아마도 엄마를 돌보는 동안 이미 아팠는지도 모른다. 다만 엄마를 돌볼 사람이 자신 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자기 몸과 마음의 상태는 애써 무시했을 것이다. 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기에게 중요한 것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내려놓는.
언니가 아프기 시작할 즈음 한 번 만날 기회가 있었다. 우리 둘 다 수다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만나면 하루 종일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언니는 항상 ‘지영아, 그 작품 읽었어? 그 음악 들어봤어? 그 작가 알아?” 끊임없이 문학, 음악, 그림 이야기를 들려주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언니가 말수도 줄고 표정도 예전 같지 않았다. 나는 언니가 엄마를 떠나보내고 애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이제 마음 추스르고 좋아하는 거 하면서 언니의 인생을 살라고 말했다. 난 언니를 위한다면서 고깃집도 데려가고 영화관도 가고 마사지 숍에도 갔다. 언니는 잘 먹지도 않았고 걸음걸이도 평소 같지 않았다. 언니가 몸과 마음이 지쳐 있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언니의 사정도 모르고 ‘운동하고 밥 잘 먹으면 예전의 언니로 돌아올 수 있어’하면서 몇 번이나 언니에게 그러자며 다짐을 했다. 하지만 언니는 어딘가 이상했다.
언니와 하룻밤을 보내고 우리는 헤어졌다. 이후 서로 다른 나라에서 전화나 카톡으로 안부만 주고받았다. 언니의 상태는 급속도로 안 좋아졌고 이제는 누구도 언니가 아프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신혼을 보내고 있던 아들에게 짐이 될까 끝까지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했던 언니. 결국 아들 손에 이끌려 요양병원으로 가야 했다. 그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팠지만 그래도 이제 병원 치료도 병행하면 좋아지겠지 생각하며 다시 만날 날을 계획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언니는 보낸 카톡을 확인하고도 답이 없었다. 어느 날인가부터는 메시지도 확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언니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남아 있던 희망이 무너져 내렸다. 난 언니를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언니가 가장 힘들고 외로울 때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는 것, 어떤 식으로든 위로와 돌봄을 하지 못했다 것. 자책과 후회가 밀려왔다. 며칠을 그렇게 앓았다.
하지만 나는 아들 셋과 남편까지 남자 넷을 거두어야 한다. 먹이고 입혀야 하니 그 일들만 겨우 해냈다. 하루는 고3이었던 큰아이가 내게 오더니 ‘엄마 마음은 알겠어. 그래도 너무 엄마 감정에만 빠져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엄마에게는 가족이 있고 엄마의 일상이 있잖아, 떠나신 분이 엄마가 이렇게 슬퍼만 하고 있는 걸 보면 좋아하실까?’
나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정신이 들었다. 아이가 보고 있었구나. 내 마음을. 애도의 시간도 허락하지 않는 현실이 야속했다. 하지만 그 현실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언니가 하늘나라에서 아프지 않고 평안하길 기도했다. 그리고 일어섰다. 언니가 지켜볼 내 삶을 잘 살아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그리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또 한 번 감당하기 힘든 소식을 전해 들었다. 상황을 직접 알만한 지인을 찾아 한국시간 새벽 1시에 무턱대고 연락을 했다. 우리 둘 모두 경황이 없었고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지인에게 상황을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며 지금 연락받고 병원으로 가고 있다고 했다. 서로를 깊게 이해해 주던 또 다른 언니였다. 며칠간 실종되었던 언니가 혼자 생을 마감한 것이다. 난 주저앉았다. 머릿속에는 도대체 왜. 왜. 왜… 라는 물음만 떠올랐다. 세상에서 빛을 바라던 언니였다. 더 높이 더 넓게 날아가려던 언니다. 얼마 전까지 메시지를 주고받았고 내가 한국에 가던 언니가 런던에 오던 곧 만나자고 약속했었다.
언니의 가족에게도 지인들에게도 아무런 연락을 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물을 수 없었다. 서로를 위로하고 보듬을 수 있는 정도의 슬픔과 고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연락하고 묻는 것이 더 큰 아픔이 될 것 같았다. 감추어진 슬픔까지 들추어내는 것 같아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묵묵히 언니의 안식을 기도하는 것 밖에는. 나는 또 그렇게 혼자 애도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외국에 산다는 것, 특별하고 멋진 일이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어려운 일, 슬픈 일,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말 몇 마디 위로와 알량한 은행 송금으로 마음을 표하는 것뿐이다. 이런 일들 앞에서 나는 어떤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낀다. 그리고 홀로 그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를 떠올린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생각한다. 한 순간 연기처럼 사라질 수 있는 것. 어제는 있고 오늘은 없을 수도 있는 것. 산다는 게 그런 거라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오늘은 아니지만 내일은 마주할 수도 있는 것. 내일이면 사라질 수도 있는 나는 아직 삶 한가운데 있다. 그 이유는 무얼까? 죽은 자를 애도하는 시간에 내 삶의 이유를 묻는다.
2. 슬픔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났다. 어둡고 추운 겨울이 지나고 집 마당에 스노우 드롭이 폈다. 영국에서 봄소식을 알리는 꽃이다. 애도의 시간을 보내며 삶을 견뎌 내고 있었지만 아직 살아갈 이유는 찾지 못했다. 살아지는 이유는 있었다. 내가 돌보아야 하는 아이들이 있으니….. 그림을 보러 다니는 것으로 위안을 찾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이상이 필요했다. 살아남은 자로서 살아남아야 하는 명분.
봄이 오기 전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나는 내 슬픔에 매몰되어 너무 먼 나라 전쟁 소식에 마음을 쓸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찾아온 봄. 런던에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슬픔이 내 가까이 있었다. 그들을 돕고 싶었다. 내가 도울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동네 학교에서 매주 열리는 난민을 위한 커피 모닝 행사에 갔다. 지역 주민과 난민들을 연결해 주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게 하는 자리다. 어린 딸을 데리고 온 젊은 엄마, 영어가 통하지 않아 아이 학교를 알아볼 수 없는 내 또래 중년 여성,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대학 졸업반 여대생, 교환학생으로 한국에도 다녀왔다는 일자리를 찾는 여성.
러시아어권에 살았던 나는 다행히 그들에게 언어적으로도 심정적으로도 도움이 될 수 있었다. 통역을 해주고 필요한 사람들을 연결해 주었다. 그리고 몇몇은 사적으로도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처음엔 서로 전쟁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곳에 정착하는 일들에 대해서만 나누었다. 두 번 세 번을 만나면서 서서히 그들의 이야기를 했다. 그곳에 남겨진 가족에 대해서. 그리고 전쟁에 대해서. 우리의 대화는 끝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다. 난 기꺼이 그렇게 해주었다. 이야기가 끝날 즈음 묻는다. 내가 무엇을 도울 수 있을까? ‘사람들이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좋겠어’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전쟁을 겪고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전하는 일.
누군가를 도움으로서 삶의 의미를 찾게 된다는 말, 너무 진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진부하지만 사실이다. 아니 사실은 내가 그들을 도운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이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디서 살아갈 의미를 찾아야 할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어두운 곳에 앉아 있는 대신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핀다. 어두움보다는 빛이 되기를 바라며. 그러기 위해 나는 내 안에 고개를 떨구고 웅크리고 있던 작은 사람을 일으켜 세운다.
살아남은 자들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