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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런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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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 스타킹 Oct 02. 2022

9월이 가고 10월이 온다

런던 일상




7,8월 우리 동네 거리는 텅 비어 있다. 이웃들은 다른 도시나 이웃 나라에서 한여름을 보내고 온다. 떠나고 돌아오는 시기가 서로 다르니 6월이 되면 서로의 여름 계획을 묻고 9월에 다시 만나자며 헤어진다.    


런던은 비가 자주 와서인지 사계절이 푸르른데 사람들이 떠난 한 여름 동안 더욱 그러해진다. 남겨진 사람들은 공원에 누워 한가로이 책을 읽기도 하고 가족과 피크닉을 즐기며 한낮의 여름을 즐긴다. 한 동안 팬데믹으로 떠나지 못했던 사람들은 올여름 어디로든 떠났다.


그러는 동안 영국은 백 년 만의 더위와 가뭄으로 몸살을 앓았다. 공원의 나무와 잔디는 색을 잃었다. 텅 빈 거리는 더 쓸쓸했고 푸르름을 잃은 공원은 버려진 땅 같았다. 뜨거운 햇빛에 말라 버린 잔디는 다시 초록빛을 띄울 것 같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가을도 떠났던 사람도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하루가 가면 또 하루가 온다. 그렇게 9월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이웃들도 돌아왔다. 구름과 바람이 몰고 온 반가운 비는 메마른 땅을 적시고 대기의 열기는 꺼진 불꽃처럼 사그라들었다. 죽은 줄만 알았던 풀과 나뭇잎에 초록물이 올라왔다.


아만다도 돌아왔다.


우리는 엘리자베스 여왕 서거 며칠 후 동네 카페에서 만났다. 잉글랜드 북쪽 여러 도시를 여행하고 고향 더비셔에서 여름을 보냈다는 그녀는 그을린 피부에 화려한 플로라 프린트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나타샤와 함께 나오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아만다를 만나기 전 나타샤에게 연락을 했다. 그녀는 런던에 없었다. 나타샤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되고 가장 먼저 영국에 도착한 사람 중 하나이다. 그런 그녀를 ‘Welcome to YOUR HOUSE’라며 맞아 준 사람이  아만다였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우리는 침묵할 수 없다’에 담겨있다.


나타샤는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 국제기구 전문직 종사자였다. 나는 나타샤가 그 누구보다 빨리 정규직 일자리를 얻고 안정적으로 런던에 정착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상황이 좋아지면 우크라이나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가끔 안부를 묻기 위해 연락을 하면 언제 떠날지 모르는 자신이 정규직 일자리를 얻는 것은 누군가에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것이라면서 파트타임 통역이나 번역일로 생활비를 마련하고 있다고 했다.


나타샤는 집을 떠나 있는 날이 많았는데  다른 지방에 정착한 친구를 만나러 가기도 하고 언어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돕기 위해 전국 이곳저곳을 다니면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9월 말 다시 런던으로 돌아올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아만다에게 나타샤가 오면 테이트 모던 ‘세잔느 특별전’을 보러 가자고 했다.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엘리자베스 여왕의 죽음을 떠올리며 평생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며 살아야 했던 한 여자를 애도했다. 아만다는 여왕의 평안한 안식을 바라는 마음으로 버킹검 궁전과 그린 파크에 다녀왔다며 사진도 보여 주었다.


우리는 새로 선출된 영국 총리 리즈 트루스에 대한 생각과 경제 상황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정 수입이 없는 프리랜서로 살고 있는 아만다도 에너지 가격과 은행 대출 금리가 높아져 부담이 크다고 했다. 기초 연금 수급자들은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올 겨울 ‘Heat or Eat’을 선택해야 한다.


걱정은 또 있다. 10월이 되면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거주하던 곳에서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집을 제공하는 후원자들의 주거 제공 의무기간 6개월이 다 되어 가기 때문이다. 물론 난민들이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함께 지내기로 한 가정도 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럴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아만다의 고향 더비셔에도 이미 그런 난민 가족이 있다고 했다. 아만다는 겨울 동안 비어있는 자신의 고향집에 그들이 와서 지내도록 해주었다고 했다.


사실 비어 있는 집에 누군가 살게 되면 난방과 전기 사용으로 경제적인 부담이 생긴다. 아만다도 그걸 모르는 건 아니다. 그래도 그녀는 항상 그런 선택을 한다. 나타샤도 원하기만 한다면 계속 함께 지낼 생각이라고 했다.


아만다를 만나면 내가 너무 작게 느껴진다. 내가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가끔 브런치와 티타임에 초대하고 공연과 전시 티켓을 구해주는 일뿐이다. 아만다는 자기는 그렇게 나는 이렇게 서로에게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하면 된다고 말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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