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일상
안나는 러시아 출신으로 런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는 바이올리니스트이다. 지난달에 출간된 인터뷰집 ‘우리는 침묵할 수 없다’에 수록된 17명의 인터뷰이 중 한 명이다. 이제는 영국 시민이 되었지만 안나는 자신을 음악가로 키워준 러시아를 항상 그리워하고 사랑했다. 하지만 전쟁을 일으킨 나라를 이제는 결코 사랑할 수 없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되고 안나의 일상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예전에는 연주 일정이 없는 날이면 박사 학위 논문을 쓰거나 공연 연습을 했다. 휴일에는 친구들을 만나 미술관에 가거나 클래식 공연장을 찾았다. 이제는 거리에서 전쟁 반대 피켓팅 시위를 하고 뜻을 같이 하는 러시아 음악가들과 우크라이나 평화를 위한 자선 음악회를 연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녀와 뜻을 함께 했고 도왔지만 몇몇 러시아인들에게 ‘나라를 배반한 사람’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안나는 서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전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 그리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했다.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을 만나 설득하고도 싶지만 그럴 시간에 할 수 있는 한, 우크라이나를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이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선택 사항에 없다고 했다.
며칠 전 안나를 다시 만났다. 공연 시즌 중에는 항상 로열 오페라 하우스 2층 테라스 카페에서 그녀를 만난다. 리허설 시작 전에 시간을 내었는데 이번 공연은 모차르트 오페라 ‘돈 지오바니’이다. 퀸 엘리자베스 서거와 장례식으로 두 차례의 공연이 취소되고 이틀 후에 첫 공연을 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오케스트라 단원이 아닌 오페라 무대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역할로 케스팅 되었다며 들떠 있었다. 안나는 오페라 가수 어머니와 오케스트라 지휘자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 오페라와 클래식 공연 중 어디를 갈야 할지 선택해야 하는 행복한 고민을 했다. 지금은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지만 오페라 마니아이기도 해서 오페라 팟캐스트 채널도 운영하고 있다.
서로 근황을 묻고 안나의 이야기가 담긴 책 ‘우리는 침묵할 수 없다’를 전해 주었다. 우리는 전쟁 이야기를 말하고 써야 하는 현실이 슬펐지만 안나와 나의 마음이 담긴 이 책을 바라보며 서로 어떤 연대감을 느꼈다. 안나는 책을 쓰다듬어 보기도 하고 페이지 하나하나를 넘겨보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챕터를 찾아 구글 번역기를 돌려 한 줄 한 줄 모두 읽어 보았다. 번역기가 쏟아 내는 비문 때문에 웃음을 터트리기도 하고 자신이 전했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긴 책을 신기해하며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책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 여름을 어떻게 보냈는지 나누었다. 나는 미국 여행에 대해 안나는 파리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있는 동생과 함께한 이탈리아와 그리스 여행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국적인 풍경에서 한 여름을 보낸 두 자매의 아름다운 사진도 보여 주었다.
우리는 평범한 일상을 이야기하다가 어쩔 수 없이 또 전쟁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는 조금은 어두워진 표정으로 숨을 크게 내어 쉬고 잠시 창 밖을 바라보았다. “러시아는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버려진 섬 같은 나라가 되었어. 러시아 여권을 들고 갈 수 있는 나라가 점점 줄어들고, ZARA나 H&M에서 옷을 살 수도 없어. 맥도널드나 스타벅스에도 갈 수 도 없어. 자동차나 아이폰도 구하기 어렵고. 전쟁 전에 집을 짓고 있던 내 친구는 원하는 자제를 구할 수 없어 다 지어지지 않은 집에서 살고 있어.”
나는 부모님의 안부를 물었다. 이번 겨울에 제3 국에서 부모님을 만나기로 했다고 했다. 사실 푸틴에 반대하며 반전 시위를 했던 그녀는 국가 모독죄로 러시아에 돌아갈 수가 없다. "지금 내 상황 때문이 아니라 명분 없이 사람이 죽어가는 전쟁을 일으킨 나라, 그런 곳은 나도 이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지난 인터뷰 때 들었던 안나의 영국인 친구와 러시아 출신인 그녀의 남편 세르게이에 대해 물었다. 전쟁이 시작되고 영국 정부가 러시아에 체류 중인 자국민 귀환 요청을 했다. 그들은 그렇게 런던으로 오게 되었다. 세르게이는 지금은 몬테네그로에 머물고 있다고. 90일 무비자로 영국에 온 그가 배우자 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결혼 후 1년이 지나야 하고 초청 배우자가 연 16,000파운드의 소득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요건이 충족되지 않아 비자 신청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3개월이 지났다. 세르게이는 더 이상 영국에 머물 수 없었지만 러시아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영국으로 돌아올 수 있을 때까지 무비자로 자신을 받아 주는 나라에서 아내와 떨어져 혼자 지내기로 했다. 아무런 직업도 없이 기다림의 하루하루를 보내야 하는 그를 생각했다.
러시아 상황에 대해서 물었다. 안나는 더 심각해져 가고 있다고 했다. 군 동원령 소문이 퍼지고 전쟁 반대 시위가 거세지고 있다고 했다. 변화도 기대했다. 러시아의 예술 영웅, 국민 가수 알라 푸가초바가 전쟁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고. 나도 카자흐탄에 살던 시절 여러 번 들었던 그녀의 노래 ‘백만 송이 장미’를 기억하고 있다. 그녀의 남편이 ‘스파이’로 지목되었다. ‘러시아 젊은이를 희생시키는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로운 러시아를 꿈꾸는 내 남편이 스파이라면 나도 스파이로 지목하라’,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당신들의 아들을 생각하라'는 그녀의 발언이 전쟁을 지지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고 했다.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리허설 시간이 다가와 우리는 다음을 기약했다. 그녀는 서둘러 바이올린과 짐을 챙기다가 할 말을 잊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여 주었다. “우크라이나 여성이 만든 천연 화장품인데 아마존 쇼핑몰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돕고 있어. 연주 때문에 핸드크림을 바르지 못하는데 이건 흡수가 빨라. 향기도 좋고” 그러면서 손을 내밀어 내 코에 살짝 대었다. 비 온 뒤 느껴지는 은은하고 향긋한 풀 냄새다. 아마존에서 판매하게 되면 꼭 구매해 달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안나는 우크라이나 국기 색깔의 하트 모양이 수놓아진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헤어져 돌아오는 길,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섬이 되어버린 나라와 그곳을 사랑했지만 이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그녀를 생각했다.
(안나를 만난 다음 날, 푸틴은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BBC를 통해 러시아 군 동원령과 핵 전쟁 위협 소식을 들었다. 그녀가 말했던 심각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