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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 스타킹 Feb 07. 2020

신이 준 선물 : 예브게니 키신

런던 문화




예전부터 악기를 배우게 되면 피아노를 치고 싶었다. 독학 중인 피아노는 여전히 제 자리이지만 언젠가는 쇼팽 곡을 연주해 보는 것이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다.

무엇이든 해보고 싶고 호기심 많던 나의 20대.

내 마음에 ‘피아노’라는 불을 지핀 건 ‘예브게니 키신(Evegeny Kissin)이다. 유튜브도 없었고, 클래식 공연 티켓을 사는 것도 사치였던 시절, 가끔 연주 실황이 담긴 DVD를 사서 보고 들었다.

그중, 하나가 1998년 발매된 키신의 BBC PROMS 독주 실황과 그의 생애를 다큐 형식으로 담은 ‘The Gift of Music’이었다. 러시아 출신 키신이 1971년생이니 20대 중반이면 소련이 개방(페레스트로이카)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이다. 피아노 신동이었던 그는 음악대학을 나오지도 세계적인 콩쿠르 출전 경력도 없다. 그런 그가 이미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반열에 올라 해마다 런던 Royal

Albert Hall에서 열리는 BBC PROMS 무대에 선 것이다.


<예브게니 키신 독주 @1997년 BBC PROMS>


알버트 홀 중앙에 덩그러니 피아노 한 대만 놓여 있고 그 주위로 빈틈없이 관객이 모여 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참고로 로열 알버트 홀은 5500석 규모다)  하늘에 닿을듯한 공연장 규모에 그리고 관객수에 놀랐다. 세상에 저렇게 넓은 공연장도 있다니,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클래식을 듣기 위해 모인다니...... 일천한 견문에 신기하기만 했다.

그렇게 시작된 키신의 공연은 나로 하여금 ‘피아노 소리가 저리 처연할 수 있구나, 경쾌할 수 있구나, 강렬하게 휘몰아 칠 수 있구나’ 알게 했다. 연주 중간중간 키신의 어린 시절 일상과 인터뷰가 담겨 있어 키신을 더욱 친근하게 했다.




세월이 흘러 이제 나는 중년을 넘어가고 있지만 ‘The  Gift of Music’의 키신은 여전히 나에게 어린 시절 그리고 20대 모습으로만 남아 있었다.

오늘, 20년도 더 지나 중년의 키신을 만났다. 연주도 모습도 많이 변해 있었다. ‘예브게니 키신’ 이름은 너무도 친근한데 모습은 낯설다.

티켓은 ‘Sold Out’이었고 연주는 초반을 제외하고는 훌륭했다. 기립 박수가 공연장을 가득 메웠고 관객은 네 번의 앙코르곡을 선물 받았다. 그런데 홀로 무대에 선 그가 쓸쓸해 보였다. 그리고 나도 쓸쓸했다. 찬란했던 그와 나의 시간이 지고 있는 것 같았다.




* 공연 후 알게 된 것이지만 키신이 일종의 자폐 증세가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예술가들 중 자폐를 앓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이는 지나치게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에게 후천적으로 발생할 수도 있다고 한다. 자기 방어 기제로 무의식적으로 외부와의 감정 소통을 차단하는 것이라고......

오늘의 쓸쓸함은 그래서였을까?



** 06/02/2020 @ Barbican Center/Evgeny Kissin’s
Beethoven
Piano Sonata No 8, Op 13 Pathétique
15 Variations and a Fugue, Op 35
Piano Sonata No 17, Op 31 No 2 Tempest
Piano Sonata No 21, Op 53 Waldstein

*** ‘The Gift of Music’
https://youtu.be/MwA3QHw88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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