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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런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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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 스타킹 Mar 31. 2020

우리 마을 이야기와 사회적 거리두기

영국 코로나

작년 크리스마스 즈음이다.

"Dear Mrs.Yoon,

12월 13일, 저녁 7시 30분 동네 주민들과 와인 파티가 있어요.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죠? 초대하고 싶어요.

답변 부탁해요. (R.S.V.P : Repondez s’il vous plait)."

우편물 투입구에 엽서 한 장이 툭 떨어졌다.  

지난여름 이사 후, 변변히 인사도 나누지 못했으니 서로에게 아직은 낯선 이웃이다. 게다가 그날 우리 집도 손님 초대가 있다. '그냥 초대한 걸 거야. 가도 어색할 거고, 굳이 갈 필요 있겠어?' 가지 않아도 될 이유는 많았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그리고 초대의 날이 되었다. 우리 집 손님이 먼저 도착했다. 간단히 식사를 하고 포도주를 마신다. 시계를 보다 망설여진다. 인사만 하고 와야겠다. 샴페인을 들고 초인종을 누른다. 주인은 낯선 나를 서로에겐 익숙한 이웃들에게 소개한다.

 “Settled in?”, “ How are your family doing?”

모두 같은 질문이다. 내가 정말 잘 지내기를 바랐던 것 같다. 이웃집 방문이라 하기엔 한껏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가 다가온다. 이사하던 날 눈인사만 주고받았던 분이다. 그 후로 창문 넘어 우리 집 앞을 지나는 할머니를 몇 번 보았다. 잠시 쉬어 가는지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서 있기도 했다.

" 나는 소피아예요. 이렇게라도 만나니 좋네. 무슨 일을 하나요?"

“ 안녕하세요. 지니예요. 일을 하는 건 아니고요. 아이들 돌보고 집안일하고 그러죠 뭐. 그리고 시간 나면 가끔 피아노 치고요 ”

“ 오.. 여기요.. 새로 이사 온 지니가 피아노를  친데요!”

어렵게 악보 읽어가며 혼자 연습할 뿐인데 아차 싶다. 몇몇 사람들이 내 주변으로 모여든다.


“6번 집에도 피아니스트가 살아요."


“ 피아노 치는 걸 한번 듣고 싶어요."


“ 이사 오가 전 어디 살았어요?"


질문이 끝이 없다. 자신들 이야기도 해준다. 미술관 자원봉사를 한다는 필립 할아버지, 주말마다 런던 공연장을 찾는다는 존슨 노부부, 노인 병원에서 가드닝 봉사를 한다는 미셀 할머니. 그리고 몇 년 전 남편을 떠나보내고 혼자 살고 있다는 소피아 할머니. 할머니는 BBC 특파원이었던 남편을 따라 인도,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여러 나라에 살았다고 했다. 일 년에 한두 번 파리(Paris) 사는 딸 집을 방문하거나 남편과 즐겨했던 크루즈 여행을 떠나신다고 했다.


분위기가 익어 갈 즈음 벨이 울렸다. 우리 집 옛 주인 토마스 부부다. 사람들은 환호했고 소피아 할머니의 표정이 가장 밝았다. 사람들은 이제 우리 집이 되어 버린 토마스 집에서 바비큐 파티며 티타임 했던 때를 떠올렸다.


토마스는 새로 이사 간 집이 마음에 들지만 이 동네가 내내 그리웠다고 했다. 소피아 할머니는 오랫동안 보지 못한 손자를 만난 것처럼 들떠 보였고 그의 손을 내내 잡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추억에 불쑥 끼어든 이방인 같았다. 그들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리고 토마스가 이 마을에서 했던 역할을 다 하고 있지 못한 것 같아 미안했다.

인사를 하고 집으로 가려는데 갑자기 소피아 할머니가 맥없이 주저앉는다. 다행히 토마스가 할머니 손을 잡고 있었기에 바로 부축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찾았다. 급히 다가온 그녀는 할머니를 현관 입구로 모시고 갔다. 환기가 되도록 문을 열고 의자를 가져와 편히 앉게 했다. 그리고 할머니가 의식을 잃지 않도록 계속 말을 시켰다.


나는 덜컥 겁이 났고 앰뷸런스를 부르자고 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미셀이고 의사라고 했다. 걱정 말라고도 했다. 미셀은 할머니의 지병이나 지금 상태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토마스는 계속해서 할머니 손등을 어루만졌다. 다행히 할머니는 안정을 찾았다.


사람들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미셀은 아무래도 집에 가서 쉬시는 게 좋겠다고 했고 토마스가 함께 가겠다고 했다. 나도 집에 가려던 참이었기에 할머니를 함께 부축하고 나왔다.

할머니 집 앞에 닿았다. 평소 친분이 있었다면 들어가 좀 보살펴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망설였다. 토마스가 당연한 듯 할머니 곁에 좀 머물다 가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문을 열고 함께  들어갔다. 토마스가 그리고 미셀이 소피아 할머니를 이렇게 보살폈구나.



오늘 유난히 지나던 길 멈추어 서서 우리 집을 바라보던 소피아 할머니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집에 머물러야 하는 노약자들이다. 자유롭게 외출할 수도 없고 마을 사람 누구도 만날 수 없다. 심지어 한 집에 살지 않으면 자식과 부모도 서로 만날 수 없다. 모두를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필요하지만 아무도 만날 수 없다는 것이 쉽지 않다. 단 하루라도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마을 사람 모두 초대해 바비큐 파티도 하고 티타임도 하고 싶다.





우리 마을은 1800년대 말 영국의 유명한 건축가 로버트 리차드슨 뱅크(Robert Richardson Banks)가 설계한 주거 지역 중 하나다. 그는 피카델리(Picadelly)에 있는 로열 아카데미(Royal Academy)를 비롯, Royal Kensington Garden, Royal Chemistry Society 등 런던을 대표하는 유명한 건축물을 많이 남겼다.

1870년대 설계된 이 곳은 해상 무역으로 크게 성공한 상인, 철강업 자산가, 고위 공직자. 해군 장교 등, 부유한 사람들의 대저택으로 개발되었다. 1930년대는 BBC 아니운서이자 BBC Radio Drama Director였던 레이몬드 레익스 (Raymond Raikes)가 살았고, 자신의 집 지하를 개조해 극장으로 만들어 가족, 친구, 주민들을 위해 셰익스피어(Shakespeare) 연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1950년대 후반 이 마을 소유자 회의(Estate Board Meeting)에서 재개발 계획이 통과, 작은 규모로 토지를 나누어 일반 주택가로 재설계했다. 그 당시 지어진 주택들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이 곳 주민 대부분은 50년 이상 이 마을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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