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보를 제작할 줄 안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난 어렸을 때 작곡을 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을 동경하기도 했지만, 악보를 만드는 사람에 대한 존경심도 대단했다.
아주 어렸을 때 피아노도 잘 못 치고, 학원도 못 다니고, 코드도 모를 때..
좋아하는 가요가 생기면 동네 책방이나 음반 가게에 가서 음반을 산 게 아니라 나는 악보를 샀다.
을지 악보...
그 노랗고 빳빳한 악보들을 지금까지 가지고 있을 여건이 안되어 아쉽게도 내 기억 속에만 있지만..
한 해 두 해 쌓여가던 그 두툼한 악보 뭉텅이를 보고 있자면 무척 뿌듯했고,
그런 악보를 만드는 어느 누군가가 참 존경스럽고 고마웠던 기억이 난다.
무릎 위에 작은 야마하 키보드를 놓고
음 하나하나 읽어 가며
리듬은 필링에 맡겨 가며
코드는 뭔지 몰라도 그냥 그 자리에 쓰인 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음악에 빠져들었던 나는
많은 길을 돌아 돌아
결국
지금도 그때의 그런 일을 이어서 하는 어른이 되었다.
세상 참. 알 것 같다가도 모르겠고 신기하고 그렇다.
누군가가 나에게 악보 제작 신청을 한다.
때로는 좋아하는 가요를, 어떤 사람은 어려운 클래식 곡을 쉽게 만들어줄 수 있느냐고 부탁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피아노곡이 아닌 곡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해줄 수 없느냐고 부탁하기도 한다.
위의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는 세 번째에 해당하는 부탁을 받고 작업하게 된 것이다.
원래 첼로나 바이올린과 같은 현악기와 오르간의 듀엣으로 주로 연주되는 이 곡은,
장엄하고도 슬프지만 무척 아름다운 곡이다.
특히 왼손의 단조롭고 무거운 옥타브의 연속은 마치 깊은 심연으로 점점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다.
또 오른손이 다루는 두 성부는 각각 주된 멜로디와 그와 함께 지속되는 화음인데, 서로 교차하며 같은 모티브를 전개해 나간다. 그것이 마치 선창을 뒤따라 부르며 고통을 조용히 인내하는 것 같다. 그러다 독백이 나오는 부분에서 그 고독함이 극에 달한다.
힘겹게 체념하는 듯한 정적인 화음들이 이어지다가 첫 번째 모티브의 반복으로 무언가를 회상하듯이, 그리고 다짐하듯이 곡이 끝난다.
어떤 예리한 구독자 한 분이 말씀하시길,
나의 오른손이 마치 마리오네트를 조정하는 듯한 느낌이란다. 너무나 통찰력 있는 그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었다.
생각해 보니 정말 그런 느낌으로 치게 되는 곡이기 때문이다.
이 곡을 신청해준 사람이 아니었으면, 나는 그냥 이 곡을 다른 사람의 연주로만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피아노 독주로 직접 쳐 볼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악보로 제작할 생각은 아예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더 최악의 상황은 너무나 아름다운 이 곡의 제목도 모른 체, 그냥 언젠가 한 번쯤 들었던 선율로 기억 속에 어떤 상자에 담아 그대로 놓아두었을 것이다. 한번 들으면 잊기 힘든 곡이긴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제목을 모르면 두 번 다시 듣지 못하고 잊힐 수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과 소통을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럴 때 나에게 기쁨을 준다.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어떤 것을 다른 누군가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그로 인해 내가 잊고 있었던 어떤 것들을 다시 일깨우는데 큰 도움을 받기도 한다.
악보를 발행하고 나면 누군가가 내가 만들어 낼 악보를 기다리다가 이윽고 커피값 정도 되는 돈을 지불한 후, 설레는 마음으로 더듬더듬 악보를 읽어 갈 상상을 하곤 한다. 내가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피아노를 친다는 것도 좋지만, 악보를 만들어 낼 줄 안다는 사실은 지금의 나를 설레게 한다.
정말이지 신나는 일이다. 이것은 나와 다른 사람이 연결되는 순간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 이 순간, 누군가가 나의 편곡으로 만들어진 피아노 악보를 어디선가 연습하고 연주하고 있다...
이런 시공간을 넘는 공유는 선순환을 한다.
나도 모르게 지속시켜왔던 이 작은 기쁨이 이제는 내 삶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이 일을 하고 싶다. 나의 귀는 더 예민해지고, 나의 손가락 끝은 더 섬세해진다. 나의 존재의 이유가 점점 뚜렷해지는 것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