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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유JiYou Apr 24. 2021

피아노를 배우러 오는 사람들 (3)

윗집에 사는 앙투안

누군가 내 작업실 문틈 사이로 쪽지를 밀어 넣고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문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던 나는 하얀 쪽지가 밀려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심장이 콩닥콩닥 점점 빠르게 뛰었다.


쪽지가 발견되었을 때 나도 모르게 두근거렸다


친애하는 이웃사촌님께,

 저는 당신의 위층에 사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피아노 수업을 한다고 생각했기에 이 쪽지를 보내봅니다. 저는 자가격리를 이용해 피아노를 한 번 배워보고 싶거든요! 만약 당신이 이 시국에도 레슨을 할 수 있고, 시간이 되신다면 저에게 당신의 수업료와 가능한 시간대를 알려주세요. 미리 당신의 답장에 감사드리고, 저에게 이 전화번호 xx xx xx xx xx로 답을 주셔도 좋고 그냥 올라오셔서 문을 두드리셔도 좋아요!

친절한 마음으로,

앙투안.


이런. 너무 귀엽지 않나! 이웃끼리 이런 쪽지라니.. 너무 낭만 있는 레트로 감성이다. 복도와 계단을 오다가다 만난 이웃들 중 한 명이 보내온 것이다. 그런데 나는 누구인지 짐작이 가기도 했다.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레슨비를 물어보던 이웃이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내 위층에 사는 사람..?!


이렇게 앙투안은 나의 학생이 되었다. 이사를 온 지 얼마 안 된 앙투안은 연극배우였다. 27이나 28살쯤 되어 보이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파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미 기타와 베이스를 칠 줄 알았고, 기타 레슨을 하고 있고, 공연도 하고 있다고 했다. 연극배우이자 기타리스트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악보를 보는 법을 몰랐다. 살면서 처음 배워보는 것이라며 악보 읽기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내가 처음 악보 보는 법을 알려주었을 때 그의 파란 눈이 쏟아져 나올 듯 동그레 지며 "이걸 다 생각하면서 피아노를 쳐야 한다고요?" 하던 게 떠오른다.




 악보를 본다는 것은 간단한 일은 아니긴 하다. 아주 정교한 기초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어릴 때 배우면 좋다고들 하는 거다. 어릴 때는 별생각 없이 하라는 대로 반복할 수 있으니까.. 나이가 들면 반복보다는 뭔가 한 번에 깨우치기를 더 원하게 된다. 첫 술에 배부르고 싶은 심보가 생기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당연하게 생기는 욕심이라고 생각한다. 피아노를 배우며 그 욕심을 내려놓는 일도 배우게 될 것이다. '한 방'보다는 조금씩 쌓이는 것들의 위력을 알게 될 것이다. 그저 나도 학생들이 그것들을 이해할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 배우는 학생에게는 악보 보기를 처음부터 고집하지는 않는다.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나는 악보 없이 가르친다. 악보가 없어도 할 수 있는 테크닉 연습은 무궁무진하게 많다. 또 손 모양과 음들을 기억하게 해서 가르칠 수 있는 곡도 너무나도 많다. 이렇게 음감이 먼저 발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손 모양만 외우는 게 아니라, 귀로 듣고 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이것은 악보 없이 피아노를 연습할 때의 장점이다. 나는 악보 없이 피아노 치는 것이 필수 연습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악보 보는 법을 배우고 싶어 찾아온 학생들에게도 45분 레슨 중 15분을 할애 해 악보 없이 연습하는 곡을 시킨다.



 악보를 보지 않고 두세 번 정도의 레슨을 하고 나면 아주 조금씩 쉬운 악보들을 내밀며 이 정도는 한번 병행해서 쳐보는 게 어떠냐고 살살 달래 본다. 보통은 다들 받아들인다. 강요당하는 게 아닌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악보들을 내밀기 전까지 나는 꽤 오랜 시간을 참을성 있게 피아노와 손과 귀만으로 레슨을 해준다. 그들은 나의 수고를 안다. 내가 그들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에게 보답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대부분, 자기에게 도움이 될 것들을 가르쳐 줄 거라는 것을 믿는다. 책임감이 더 해지는 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앙투안은 성실한 학생은 아니었다. 하지만 질문이 많은 학생이었고 알고 싶은 게 많은 학생이었다. 치고 싶은 곡들도 아주아주 많은 학생이었다. 문장이 현재 진행형이 아닌 이유는, 몇 번의 레슨 이후 잠시 쉬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마음만 너무 앞서지 않았나 싶다. 차분하게 연습을 해야 하는데, 그의 집에는 피아노도 없었다. 또 한편 그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직업을 잃을 위기에 놓였다. 프랑스 내의 모든 연극, 공연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피아노 레슨을 계속 받기엔, 금전적으로 부담스러워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그는 풀이 죽어 있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웃으며 인사를 하긴 하지만, 곧 요즘 되는 일이 없다며 푸념을 하곤 한다. 나는 그를 위로하며 ‘곧 좋은 날이 다시 올 거야.’라고 나도 확신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해준다. 내가 그렇게 믿고 싶어서도 있고 달리 해줄 말이 없어서 이기도 하다.


작업실에 있으면 가끔 그가 치는 기타 소리가 들려온다.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내 집까지 크게 들리기도 한다. 앙투안은 좋은 음악을 많이 듣는데, 한 곡을 끝까지 듣는 법이 없다. 듣다가 갑자기 다른 음악으로 바꾸기가 일쑤다. 그러면 무심결에 그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던 나는, 나도 모르게 실망을 하기도 한다. 

' 어이, 앙투안! 그만 좀 바꾸지 그래...’
 

내가 피아노 레슨을 시작할 때면 ' 피아노 소리 나네, 너 왔구나? 언제든 얘기하고 싶으면 찾아와도 좋아! 너의 남편도 같이! ' 하며 문자가 오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예상한다. 그는 다시 피아노를 배우러 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눈이 파란 이웃 친구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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