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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유JiYou Apr 18. 2021

피아노를 배우러 오는 사람들 (2)

건축 엔지니어 바스티앙



 바스티앙이라는 친구는 내 유튜브 채널에서 처음으로 영상의 소재가 되어 준 고마운 학생이다. 그는 건축 엔지니어이다. 건축가도 아니고 엔지니어도 아닌 건축 엔지니어이다.. 내가 무식한 건지, 너무 세상을 모르는 건지 알쏭달쏭한 직업이 참 많다. 그리고 다행이다. 다양한 직업이 있다는 게 말이다. 이렇게 세상 어딘가엔 내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직업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니 괜히 위로가 된다. 사람들이 다 의사, 변호사, 주식 설계사가 되어 돈을 벌어야 하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바스티앙은 레슨 첫날부터 내 채널의 소재가 되어주었다.



 키가 껑충하게 큰 이 건축 엔지니어 청년은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며 나를 찾아왔다. 그의 할머니가 피아노를 잘 치셨단다. 그런 할머니에게 언젠가 엘리제를 위하여를 직접 연주해드리고 싶다던 그의 마음이 너무 이뻤다. 이제 겨우 25살 청년이다. 그 또래에 할머니를 위해 피아노를 배울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많지는 않을 것이다. 작년 9월부터 배우기 시작했으니 4월 중순인 지금 7개월째가 되어 간다. 중간에 또 자가격리가 되어 웹캠으로 수업을 이어갔다. 엘리제를 위하여는 이제, 당연히 너무 잘 친다. 내가 당연하다고 말한 이유는 간단하다. 포기하지 않으면 인간은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걸 피아노를 치며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포기한 적이 없고, 나도 그를 포기한 적이 없다. 그러니 못 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처음 피아노를 배우려는 목적을 단 1개월 만에 이루었다.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좋아하셨단다. 그러나 그는 그 이후에도 피아노를 계속 배운다. 이제는 그 자신을 위해서 배운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 자신을 위한 일이었을 거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기가 직접 피아노를 배워 연주해주고 싶다던 그의 소망은 아름다웠다.



바스티앙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는 플레이 리스트







 현재 진행형인 그의 피아노 배우기는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거르지도 않는다. 거금을 들여 기존에 가지고 있던 연습용 건반을 대신할 고급 퀄리티의 디지털 피아노를 샀다.. 그는 초반에 작곡에도 관심을 보였다. 도레미를 간신히 배운 첫 레슨으로부터 3주 동안 그는 일주일에 한 곡씩, 8마디에서 10마디 정도씩 되는 짧은 곡을 써서 가지고 왔다. 가지고 있던 수첩에 악보를 직접 그려서 말이다. 물론 음표의 길이는 말도 안 되게, 그래서 참으로 신선하게 창작하여 그려왔지만, 어떤 의도로 쓴 것인지는 알 수 있을 만큼 아주 깔끔하게 그려 왔다. 그리고 그 곡들을 직접 연주해 줬다.


그가 나에게 헌정해준 그 3곡은 그렇게 나의 일기장에 잘 보관되어 있다.

바스티앙이 작곡하고 직접 그려온 악보들. 연필로 그려진 부분은 나의 조언이다.




나는 가끔 이렇게 학생들이 곡을 써줄 때마다 황홀한 감동을 느낀다. 곡을 써 온 학생은 바스티앙뿐만이 아니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곡을 써 온 학생들 중 프로페셔널 뮤지션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점이다. 다들 이제 겨우 막 피아노를 시작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피아노 배우기를 계속해 나가면서 작곡에 대한 열의는 잠시 멈춘다. 바스티앙도 세 곡 이후, 다시 나에게 새로운 곡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안타까웠지만 닦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나는 그저 기다린다.


그렇게 한 가지 내가 깨달은 건, 사람들은 누구나 창작의 욕구가 있으며, 그것을 실천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욕구는 자신이 그저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마음껏 발휘되고, 자신의 능력이 상승될수록 조금씩 사그라든다. 창작욕구는 테크닉과 비례하지 않는다. 창작은 머릿속이 가볍고 순수할 때 그 구상이 더욱 자유롭게 펼쳐진다. 많이 배울수록 창작을 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알면 알 수록 상상되는 음들의 퀄리티가 높아지고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점점 너무 큰 그림을 그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후 정말 창작을 하고 싶으면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끈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천재는 뭔가 창작 능력이 특출 난 사람이 아닌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 창작 욕구를 머릿속에 그려지는 만큼 실현시키려는 의지가 남다른 사람인 것 같다.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킨 사람들은 그만큼 자기 인생을 아낌없이 창작에 헌신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고된 고생길을 감내한 결과로 위대한 작품을 남긴 것이다. 후세에 그것들을 즐길 수 있는 우리는 위대한 예술가들의 희생으로 인해 남겨진 작품들로 여유롭게 문화적 풍요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어느  오후, 나는 조용히 혼자 작업실에서 영상편집을 하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나의 작업실 밖에서는,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였을까? 갑자기 문틈 사이로 하얀 쪽지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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