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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유JiYou Jan 03. 2022

산책 (오디오 드라마 용)

첫사랑


배경 : 1990년대. 조용한 동네, 남녀 공학 중학교.


등장인물 :

유진 (16살) : 활달하지만 약간 둔하다. 매년 반장을 할 만큼 적극적이고 구김이 없다. 주위 사람들을 잘 챙기는 대신 남들의 시선도 신경을 많이 쓰는 편. (너무 귀엽지는 않은, 아이지만 어른스러운 말투. 하지만 어린 목소리.)

현수 (16살) : 차분하고 과묵하다. 말이 없어 약간 차가워 보이지만, 유진이를 만나면 눈빛부터 달라진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아도 마음은 따뜻한 아이. (어리지만 조숙한 말투, 차분하고 젊잖은 너무 얇지 않은 목소리.)

유진 엄마 (40대 초반) : 조금 무뚝뚝하고 엄한 성격. 지켜야 할 규율은 엄하게 지적하지만, 착한 유진을 믿고 사랑한다.

여학생 (16살) 1,2,3 : 유진의 같은 반 친구들. 1은 활달한 성격, 2는 조용한 성격, 3은 새침한 성격.

남학생 (16살) 1,2,3 : 현수의 같은 반 친구들. 1은 호기심 많고, 2는 다혈질, 3은 소심한 성격.

여학생 (15살) 4,5 : 유진과 현수의 2학년 때 같은 반 친구들. 4는 다혈질, 5는 자신감 있는 성격.

남학생 (15살) 4,5 : 유진과 현수의 2학년 때 같은 반 친구들. 4는 순한 성격, 5는 분위기 파악 못하는 성격.

체육 선생님 (남 / 30대 후반) : 전직 복싱 선수. 재치가 있고 수업에 별 관심이 없는 듯 심드렁 하지만 아이들을 좋아하고 수업을 즐긴다.



#1 오프닝 

E. 오프닝 음악 시작. 음악 줄면 내레이션 시작.



유진 내레이션 : 우리는 산책을 하듯 사랑을 했다. 길모퉁이를 돌아 걷고 또 걸으며..

현수 내레이션 : 우리는 사랑하듯 산책을 했다. 첫사랑이었다.



E. 음악 계속 흐르다 멈추면 이야기 시작.



엄마 : 학교 끝나면 집으로 바로 와야지, 어딜 그렇게 싸돌아 다니니?


E. 음악 다시 잔잔하게 배경음악으로 깔린다.


유진 내레이션 : 내 나이 열여섯. 자랄 만큼 자란 나의 통금 시간은 애석하게도 저녁 7시다. 부모님이 엄하셔서 해 떨어지고 집 밖에 나가면 큰일이 나는 줄 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남자 친구가 있다. 당연히 부모님께는 비밀이다. 우리는 같은 중학교에 다닌다. 남자 친구는 3학년 1반, 나는 5반이다. 친구들도 선생님들도 우리의 비밀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도 모르게 만나온지도 어느덧 6개월이 되었다.



E. 음악 커지고 멈추면 다음 장면.


#2 체육 시간


E. 체육 시간. 웅성거리는 아이들 소리. 운동장에서 공 차거나 뛰는 소리. 호루라기 소리.


유진 내레이션 : 무더위가 막 시작된 6월. 3학년 전체 합동 체육 시간이 찾아왔다. 우리는 모두 운동장에 모여 뜀틀 넘기, 멀리 뛰기, 멀리 던지기 등을 연습하고 있었다. 나와 몇몇 친구들은 순서를 기다리며 똑같은 체육복을 입은 아이들의 분란한 움직임들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여학생 1 : (갑작스레 호들갑 떨며) 야, 쟤 봐봐 쟤, 3학년 1반, 키 제일 큰 애. 방금 멀리 뛰기 하는 거 봤어? 2미터 50 이래! 인간이니 퓨마니?

여학생 2 : (다소 차분하게 호응하며) 쟤 공부도 잘 한데. 3학년 되면서 선도부로도 뽑혔잖아. 근데, 구본승 닮은 거 같지 않아?

여학생 3 : (새침하게) 나랑 유진이는 남자한테 관심 없어서 몰라. 그치, 유진아?

유진 : (당황을 감추며) 어? 어,어.. 우리 같은 반이었어, 2학년 때... 그리고 같은 선도부라.. 조금 알아. 하하..

여학생 1, 2 거의 동시에 : 예 : 어머, 진짜? 우와.. / 쟤를 안다고? 우와 대박. 

여학생 3 : 그래? (의아해하며) 너 한 번도 쟤 얘기한 적 없었잖아.

유진 : 음.. (잠시 망설이다 멋쩍은 듯) 얘기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웃으며) 하하.. 미안.


유진 혼잣말 : (작게) 얘기했다가 학교 전체에 다 소문나게...?


여학생 1 : 쟤 2학년 때도 인기 많았어?

여학생 2 : O.L. 그때는 몇 등이었어?

유진 : 공부도 꽤 잘했고 인기도 많았어.

여학생 3 : (심드렁하지만 궁금함을 못 참고) 여자 친구는 있데?


유진 내레이션 :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대답했다.


유진 : (헛기침하며) 있겠지.

여학생 3 : (대뜸) 우리 학교? 다른 학교?

유진 : 아... (뜸 들인다) 글... 쎄.. 그게.. O.L.

여학생 2 : O.L. 너 남자한테 관심 없다며?

여학생 1 : 에이, 관심 많구만 뭐~

여학생 3 : 아니거든, 나 관심 없거든!


남자 체육 선생님 : (멀리서 소리친다) 3학년 5반 여학생들, 뜀틀 준비!


유진 내레이션 : 으아.. 내가 제일 싫어하는 시간이 오고야 말았다.. 3학년 전체가 보는 앞에서 뜀틀을 넘어야 한다니.. 나는 운동 신경이 그리 잘 발달한 편이 아니었다.. 내 남자 친구와는 달리..



남학생 1 : 어, 여자애들 뜀틀 시작했다.

남학생 2 : 에게, 뜀틀 높이가 저게 다야? 1미터도 안 되겠네. (놀리듯 웃으며) 저것도 못 넘는 애들이 있네. 하여튼 여자애들이란.. 둔하기는..

남학생 3 : 유진이는 분명히 운동도 잘할 거야. 키도 큰 편이고 팔다리도 길어서..

남학생 1 : 유진이? 아.. 5반 반장. 너.. (놀리듯이) 쟤한테 관심 있냐?

남학생 3 : 아.. 아니이.. 그냥... (얼버무리듯) 2학년 때 같은 반이었어.. (생각났다는 듯) 여기, 현수랑 같이.. 야, 현수야.

현수 : (걱정스럽게 유진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유진이.. 운동.. 잘 못할 걸?

남학생 2 : 야, 아무리 운동을 못해도 저걸 못 넘겠냐?

남학생 1 : 곧 유진이 차례다.

남학생 3 : 파이팅! 한유진!

남학생 1 : 이 자식, 관심 있구만 뭘.


현수 내레이션 : 내 친구들은 내가 유진이 남자 친구라는 걸 아직 모른다. 나는 상관없는데 유진이는.. 사람들 앞에 드러내는 것을 꺼린다. 우린.. 사귀기엔 너무 어리다나.. 휴.. 유진이는 걱정이 너무 많다. 반면 나는 걱정할게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딱 하나. 유진이만 빼고.. (사이) 지금도 나는 이 아이 걱정을 필요 이상으로 하고 있었다.


현수 혼잣말 : 저 녀석.. 뜀틀 넘다 넘어지면 어떡하지? 설마.. (안심하려 애쓰며) 에이.. 별로 높지 않으니까 저 정도는 넘을 수 있겠지..?


현수 내레이션 : 하지만.. 나의 걱정은.. 그냥 걱정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남학생 3 : 아!...

남학생 1 : 어?...

현수 : (웃음 섞인 한숨)

남학생 2 : 쟤.. 뜀틀 부쉈는데..?


E.  웅성대는 운동장 소음


유진 혼잣말 : (아주 작게) 아.. 창피해... 숨고 싶다.. 사라지고 싶다, 지금 당장...


남자 체육 선생님 : (멀리서 소리치며) 한유진, 뜀틀에 엎드려서 뭐해? (주위 학생들에게) 야, 쟤 좀 끌고 내려와라. (혼잣말로) 나, 원.. 참.. 뜀틀 넘다 넘어지는 애들은 봤어도 뜀틀 위에 드러눕는 애는 처음 보네.


여학생 1,2 거의 동시에 : (예 : 유진아, 괜찮아? / 안 다쳤어? 안 아파?)


유진 혼잣말 : (작게) 죽은 척 하자...


여학생 3 : 너.. 뜀틀 부서진 거.. 알아?


유진 혼잣말 : (울먹이며 작게) 그럼.. 알지... 그래서 내가 너무 창피해서 이러고 엎드려 있는 거잖아..


여학생 1 : (놀라며) 기절한 거 아냐?

여학생 2 : (울상으로) 어떡해..? 기절한 거 같은데?

여학생 3 : (태연하게) 창피해서 기절한 척하는 거 아니야?

유진 :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맞아!

여학생 1,2,3 : (갑작스러운 유진의 움직임에 놀라며 거의 동시에 소리_예: 아, 깜짝이야. /유진아. /어머)

유진 : (친구들을 향해 작게) 얘들아, 나 양호실로 좀 데려가 줘.. (흐엉) 나 쪽팔려 죽을 거 같애...



현수 내레이션 : 나는 웃음이 났다. 이건 생각을 못했는데.. 뜀틀을 부수고 그 위에 개구리처럼 누워버린 유진이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잠시 후 얼굴이 붉어진 유진이는 같은 반 여자애들과 함께 자리를 옮겼다. 아마도 양호실에 갈 모양이다.


현수 혼잣말 : 많이 다치지는.. 않았겠지?



E. 음악. 멈추면 다음 씬



#3 편지


E. 수업 마치는 종이 울리고, 책상 정리하는 소리 들린다.


여학생 1 : 얘들아, 우리 집에 가기 전에 떡볶이 먹고 가자!

여학생 2 : 콜! 오뎅도 먹을 거지?

여학생 1 : 당연한 거 아냐?

여학생 3 : 나 체중 관리해야 하는데?

여학생 2 : (떨떠름하게) 그럼.. 너는 안 갈 거야?

여학생 3 : (새침하게) 엄마한테 너네들이랑 저녁 먹었다고 하지 뭐.

여학생 1 : (헛웃음이 나지만 신나서) 그럼, 다 같이 가는 거다!

여학생 3 : 가자. (뒤에 있는 유진을 향해) 뭐해, 유진아. 빨리 와.

유진 : 응, 너네 먼저 나가. 나 책상 서랍 좀 정리하고.


E. 교실 소음 끝


유진 혼잣말 : 오늘은 타이밍을 놓쳤네.. 아까 체육 시간에 양호실만 안 갔어도 몰래 1반에 들를 수 있었을 텐데.. (한숨)


유진 내레이션 : (사이) 나와 현수는 아침 일찍 등교를 한다. 아직 캄캄한 새벽 여섯 시, 1등으로 학교에 도착해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서로의 교실로 들어간다. 교실로 가기 전, 약속한 듯 서로에게 쓴 편지를 교환한다. 그런데 오늘 아침, 나는 늦잠을 잤고.. 평소처럼 일찍 온 현수는 내 책상 서랍에 편지를 두고 갔다.


유진 혼잣말 : 내가 쓴 편지.. 지금이라도 몰래 줄 수 있는 방법은 없겠지..


유진 내레이션 : 현수가 쓴 편지에는 자기 반에서 있었던 재밌는 이야기들과 요즘 즐겨 듣는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나를 향한 낯 뜨거운 고백들... 얘는 어디서 이런 표현들을 배우는 걸까? 순진하고 얌전한 줄 알았는데 엉큼하다.


E. 음악


현수 편지 내레이션 : 유진아! 난 너랑 손잡고 걸을 때 가장 행복해.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우리, 대학생 되자마자 결혼하자. 난 지금이라도 당장 할 수 있지만. 키스도 안 해보고 결혼할 수는 없으니까..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손잡는데도 반년이나 걸렸으니.. 키스는 언제 허락해 줄 거야? 정말.. 대학생 될 때까지.. 안 해줄 거야?



유진 혼잣말 : (어색함에 혼자 진저리 치며) 으.. 안 되겠다.. 내 편지는 일요일 새벽에 만나면 주자.



#4 일요일 새벽 다섯 시 반


E. 장면 전환 음악. 배경으로 계속 깔린다.



현수 내레이션 : 일요일 새벽 다섯 시 반. 우리는 학교 근처에서 만나 손잡고 산책을 한다. 유진이는 이 시간에만 유일하게 손을 잡게 허락해 준다. 나는 학교에서도 길거리에서도 유진이의 손을 잡고 있고 싶지만, 유진이는 안된다며 펄쩍 뛴다. 사람들에게 티를 내면 안 된다. 아직 우린 너무 어리기 때문이다. 안 좋은 시선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밝히는 것은 최대한 나중으로 미뤄야 한다나.. 그래서 생각해 낸 데이트 방법 중 하나가 일요일 새벽 산책이다. 물론 매일 아침 일찍 등교도 함께 하지만 그때는 절대로 손을 잡고 걸을 수는 없다. 교복을 입었을 때는 손을 잡기는커녕 1미터쯤 떨어져서 걸어야 한다. 그러니 나에게는 일요일 새벽 산책이 그나마 편안하게 유진이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E. 음악 잠시 커졌다 작아진다.


현수 내레이션 : 때론 아무도 없는 학교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익숙한 골목길을 걷고 또 걸었다. 우린 말없이 걸었고, 하고 싶은 말들은 편지에 적어서 줬다. 같은 공간에서 나란히 각자의 상상 속을 걸었다. 그 상상 속에는 서로가 있었다. 오래도록 참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이 없을 때면 나는 슬그머니 유진이의 손을 잡았다. 그러면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러다 어디서 인기척이라도 들린다 싶으면 유진이는 놀라서 손을 화들짝 빼곤 했다. 나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또 웃음이 났다.


E. 음악 잠시 커졌다 작아진다.


현수 내레이션 : 학교에서는 아는 척도 해서는 안된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가끔 장난을 친다. 복도에서 마주칠 때면 일부러 시선을 거두지 않았고, 그걸 애써 외면하는 유진이의 볼은 내 눈빛을 따라 붉게 물들었다. 그러면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가끔은 그렇게 내 눈을 피하며 걸어가는 그 애의 손에 쪽지를 쥐어주기도 한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데도 유진이는 대뜸 나를 동그란 눈으로 흘겨보며 복화술을 한다.


유진 : (복화술로 속삭이듯) 야! 느가 브믄 으뜩케 ??? 미츳어 증믈!!

현수 : (웃는다) 알았어, 알았어. (사이) 일요일 새벽에.. 알지?

유진 : (아주 작은 목소리로) 알았어. (다정하게) 따뜻한 커피 가져갈게!



#5 우리가 같은 반이었을 때


E.  새로운 음악 시작


현수 내레이션 : 같은 반 일 때가 좋았다. 그땐 하루 종일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수업시간에 열중하는 모습이나 쉬는 시간에 웃고 떠드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나의 행복한 일상이었다. 물론.. 그때도 유진이를 독차지할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반장이었던 유진이는 항상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아이들은 유진이 옆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그 아이들 틈에서 나는 나름대로 계속 사인을 보냈다. 너를 좋아한다고.. 하지만 유진이는 알아듣지 못했다. 나를 그냥 자기 주위에 있는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대했다. 어느 날 나는 그게 화가 났다.



E. 음악 끝. 웅성웅성하는 교실 소리


현수 : (침착하고 단정한 목소리) 유진아.

유진 : (뭔가에 열중하다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응? (곧 다른 친구에게) 야, 주희야. 나 풀 좀 빌려줘.

여학생 4 : 응, 여깄어. (짜증 나는 듯) 야, 부채 만들기 너무 어려운 거 아니냐?

남학생 4 : 진짜.. 여기다 그림 그리는 것도 어려웠는데, 대나무살에다 직접 붙이기까지 해야 한다니..

여학생 5 : (놀리는 투로) 그건 늬들이 똥 손이니까 그런 거지 ㅋㅋㅋㅋㅋ

아이들 : (다 같이 웃거나 반박한다. 예 : 뭐라고? / 아오, 이걸 그냥. / 아니거든. / 지는..)

현수 : (변함없이 침착하게) 유진아.

여학생 5 : (정색하며) 이거 실기 시험에 점수 반영된데. 다들 집중하고 만들어~

남학생 4 : 현수는 벌써 다 만들고 놀고 있네.

현수 : (아까와 같은 톤으로) 유진아.

유진 : (대수롭지 않게) 응, 왜, 말해. (현수의 작품을 보며 놀란다) 우와아!! 너는 용을 그린 거야??? 이걸 네가 그린 거라구우?? 대단하다아!!

여학생 4 : 대박! 얘들아 이거 봐봐!!

아이들 : (거의 동시에 왁자지껄. 예 : 어디 봐봐 / 우와! 진짜 잘 그렸다 / 현수가 그린 거야?)

현수 : 우리, 영화 보러 갈래?


  E. 모든 효과음 멈추고, 잠시 모두 말이 없다.


유진 : (천진하게) 응?

여학생 5 :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박, 지금 김현수가 한유진한테 영화 보러 가자고 했어.

여학생 4 : (아주 작은 소리로) 오오올....!

여학생 5 : (작은 목소리) 이거 고백 아니야?

남학생 4 : (작은 목소리) 대... 박...

현수 : (유진에게. 단도직입적. 차분한 말투) 영화 보러 가자구.

유진 : (당황하며) 여... 영화!? (잠시 생각하다. 알겠다는 듯이) 여기.. 우리 다 같이 보러 가자구? 하하.. 그렇구나! 야, 재밌겠다, 너무 좋은 생각인데?

남학생 5 : 우와! 우리 영화 보러 가? 언제 보러 갈 건데? 뭐 볼 건데?

여학생 4 : (작게) 저 바보..

여학생 5 : (작게) 미친 거 아냐?

남학생 4 : (작게) 대... 박...



E. 재밌는 음악


현수 내레이션 : 같은 반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며 돌아다니던 시절.. 그 무리 안에 나와 유진이가 있었다. 여러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유진이에게 비밀스러운 눈빛을 주었다. 의아해하며 나를 보던 유진이의 미소가 좋았다. 편하게 웃고 떠들 수 있던 그 시절이 사뭇 그리워지지만, 그렇다고 지금이 싫은 건 아니다. 지금은 같은 반은 아니지만, 우리 둘만 있을 수 있는 시간들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땐 다른 방해꾼들을 뚫고 유진이에게 다가가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나는 늘 정확히 내 의사를 전달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을 할 줄 몰랐고, 유진이는 생각보다 순진했다. 답답하리만큼 내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어느덧 2학년이 끝나가고 있었다. 겨울방학을 하루 앞둔 날.. 나는 용기를 내어 크리스마스 카드를 썼다. 확실한 고백이 담긴 카드였다. 그런데 나보다 먼저 유진이가 나에게 카드를 전해 주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에게만 쓴 것은 아니고.. 반 전체 아이들에게 쓴 카드 중 하나가 나에게 전달되었을 뿐이었다.


E. 잔잔한 캐럴이 흐른다


유진 카드 내레이션 : 안녕, 현수야! 너는 우리 반에서 키도 가장 크고, 잘 생기고, 공부도 잘해서 좋겠다. ^^ 그런데.. 최근에.. 너.. 나한테 화 나는 일 있었니? 나를 보는 너의 눈빛이.. 예전과는 좀 다르게 느껴져서 말이야.. 그래도 우리 함께 이곳저곳 놀러도 다니고 좋았잖아! 섭섭한 게 있었다면 다 풀었음 좋겠다. 이제 우리 모두 다른 반으로 흩어지는데.. 좋은 기억만 가지고 헤어지자! 3학년 때도 공부 열심히 하고. 좋은 고등학교 가야 좋은 대학 간다! 파이팅! 메리 크리스마스~~ 반장, 유진이가.


E. 캐럴 끝


현수 혼잣말 : (당황하며) 이게 무슨 말이야.. 완전히 반대로 알고 있잖아?


현수 내레이션 : 그 카드는 반장이 의무적으로 반 아이들에게 남긴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지만, 나의 고백이 무색해질 만큼 반대로 이해하고 있는 유진의 답답함에 어의가 없어졌다. 아무리 둔해도 그렇지, 이 정도일 줄이야.. 나는 내가 써둔 카드를 주는 대신, 새롭게 편지를 써서 주기로 했다.



#6 확실한 고백 


E. 장면 전환 음악.

E. 음악 사라지면 현관문 닫는 소리.


유진 : 다녀왔습니다!

엄마 : (부엌에서 요리를 하며) 응, 그래. 학원 다녀왔니?

유진 : 네, 밖에 엄청 추워요. 눈도 많이 오구요.

엄마 : 그래, 어서 씻고 저녁 먹어. (잠시 그릇 소리) 아, 참. 너한테 편지 왔더라.

유진 : 편지요?

엄마 : 응. 현수라던데? 니 책상에 놔뒀어.


유진 혼잣말 : 현수한테... 편지...라고?


유진 내레이션 : 그 아이에게서 편지가 온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줄곳 어울려 놀던 같은 반 친구들 사이에서 유독 속을 알 수 없는 아이였다. 가끔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져서 쳐다보면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은 현수와 마주치곤 했다. 처음엔 조금 놀라긴 했는데.. 눈빛이 좀 매서워서 그렇지 착한 아이였다. 말수가 적었고 가끔 뜬금없이 재밌는 아이디어를 냈다. 덕분에 나는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과 영화관도 가고, 놀이동산도 가고, 스케이트장도 갔다. 하지만 나를 보던 눈빛이 아무래도 조금 이상해서 찜찜하던 터였다.


유진 혼잣말 : 무슨 할 말이 있길래 편지까지 썼어.. 하여튼 특이한 애야.. (편지를 물끄러미 보다가) 에이. 뜯어보면.. 알겠지, 뭐라고 썼는지.


E. 봉투 뜯는 소리. 음악 시작.


유진 내레이션 : 편지를 읽은 나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유진 혼잣말 : 세상에...!


유진 내레이션 : 한유진..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었다. 그동안 현수가 나에게 했던 말들, 알 수 없는 눈빛들이 이제야 다 이해가 되었다. 문득 가끔 현수가 나에게 뭔가를 얘기하려 내 팔을 잡았을 때 느껴지던 찌릿한 감각이 떠올랐다. 그와 비슷한 몇몇 순간들이 동시에 떠오르며 나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땐 영문을 몰랐는데.. 나도 분명히 무언가를 느꼈던 순간들이 있었다.



유진 혼잣말 : 대... 박... 김현수가.. 나를 좋아한다니..



E. 음악 커지다가 사라진다.



유진 내레이션 : 김현수는 우리 반뿐만 아니라 학교 전체에서 인기 짱인 아이다. 곱상하게 생긴 얼굴답지 않게 운동도 잘했고 공부도 잘했다. 특유의 과묵한 성격이 내 마음에도 들었었다. 다른 남자아이들처럼 짓궂지 않고 진지해서 달라 보였다. 하지만 그런 현수가 나를 좋아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못해봤는데..



E. 집 전화가 울리는 소리



엄마 : (방 문 밖, 거실에서 외친다) 유진아, 전화 왔어. 너랑 같은 반 친구라는데?

유진 : (문 밖을 향해) 아, 네. 엄마!


E. 편지를 정리하는 소리와 호흡. 곧이어 방 문 열리는 소리.


유진 : (무심하게) 여보세요?

현수 : 편지 받았어?

유진 : (헙, 하고 놀라는 호흡) 야!... 아, 잠깐만. (엄마한테 외친다) 엄마, 저 방에서 받을게요. 방학 숙제 때문에 온 거예요.. 전화.. 하하..

현수 :...


E. 방 문 닫는 소리


유진 : 어, 현수야. 편지.. 잘 받았어.

현수 : 지금 나올래?

유진 : (당황하며)아, 안돼! 나.. 저녁엔 집 밖에 못 나가. 알잖아.

현수 : (한숨).. 많이.. 놀랐어?

유진 : 어?.. 응..


유진 내레이션 : 우린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사이) 긴 정적을 깬 건 현수였다.


현수 : 편지에 쓴 대로야.

유진 :...

현수 : 너 좋아한다고.

유진 :... 어...

현수 : 나랑.. (사이) 사귀자.


E.  배경음악 시작


유진 내레이션 : 그렇게 그 해 겨울 방학. 우리 둘은 사귀기 시작했다. 사귄다고 해도 평소와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영화를 보러 갈 때나 밥을 먹으러 갈 때 우리와 늘 함께하던 친구들 없이 딱 우리 둘이서만 갔다는 것. 그리고 겨울 방학 내내 현수가 매일 같이 집 앞으로 찾아와 온 동네를 걸어 다녔다는 것이다. 안 가본 골목길을 걷거나, 같은 곳을 뱅뱅 돌 때도 있었다. 우린 주로 말없이 걸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웃었고, 벤치가 나오면 잠시 앉았다. 그냥 그렇게 산책을 하다가 내가 집으로 들어가야 할 시간이 가까워지면 항상 비슷한 내용의 대화가 오갔다.



현수 : 손 잡아도 돼?

유진 : 뭐라구우?

현수 : 손..

유진 : 안 돼.

현수 : 왜?


현수 내레이션 : 유진은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냥 웃었다. 내 마음을 확실히 알고부터 유진이는 더 이상 둔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영악하게 우리 둘의 관계를 숨겼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 받아들였다. 우리 사이를 숨기려고 혼자 끙끙대는 유진이의 모습을 보는 것도 나름 꽤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겨울 방학 내내, 우리는 온 동네를 누비며 아무도 모르게 둘 만의 시간을 만끽했다.


#7 학교에서는 비밀


E. 걷는 두 사람의 발소리


유진 : 아.. 내일 개학이다.. 이제 3학년 되면 우리 다른 반이네.

현수 : 그럼 손 잡아도 돼?

유진 : 우쒸. 너는...

현수 :...

유진 : 앞으로 학교에서 만나면 아는 체하지 마. 알았지?

현수 : 뭐라구? 왜?

유진 : 소문나면 곤란해 지니까..

현수 : 곤란할게 뭐가 있어?

유진 : 그냥.. 당분간은 그렇게 해줘. 알았지?

현수 : (단호하게) 싫은데.

유진 : (애원하듯) 선생님들한테 혼날 거 같아서 그래.. 쬐끄만 것들이 벌써 사귄다고... 그러다 부모님한테도 말씀드리면 어떡해..


현수 혼잣말 : (작게) 하.. 이런.. 숨기고 싶은 이유가.. 그게 다야? (살짝 웃으며) 아직 어린애네..


유진 : 뭐라구?

현수 : 알았어. (사이) 대신 조건이 있어.

유진 : 뭔데?

현수 : 학교 갈 때 같이 가. 학교 끝나고 집에 갈 때도. 내가 바래다줄게.

유진 : 에이, 그럼 애들이 다 알잖아.


유진 내레이션 : 나를 쏘아보는 현수의 눈빛이 이번엔 제법 매서웠다.


유진 : 그.. 그럼 학교 갈 때만 같이 가. 끝나고 나서는 내 친구들이랑 갈 거야.

현수 : (협상을 받아들이며) 그래. 그러자. (기분 좋아짐) 몇 시에 만날까? 너네 집 앞으로 갈게.

유진 : 다섯 시 반. 우리 집 앞 말고, 큰길 사거리.

현수 : 뭐라고? 그때 학교 가면 여섯 시야.

유진 : 그래야 학교에 아무도 없지.  

현수 :... 그건.. 그러네.

유진 : 그럼, 다섯 시 반에 사거리에서 만나. 나 이제 들어간다.

현수 : 잠깐만!

유진 :.. 왜?

현수 : 이거..


유진 내레이션 : 현수의 손에는 작은 편지 봉투가 들려 있었다.


유진 : 어..?

현수 : 매일.. 쓸 거야. 편지.

유진 : 응?

현수 : 이제.. 매일 못 보잖아. 같은 반이 아니라..


유진 혼잣말 : (작게) 그래서 매일 편지를 쓰겠다구? (반한 듯 탄식하며) 얘.. 정말 귀엽다..


유진 : (마음을 숨기려 헛기침) 매일 볼 건데? 아침마다 같이 등교하면 되잖아.

현수 : 진짜?

유진 : 응.

현수 : 너무 좋다.. (현수 유진 함께 작게 웃는다.) 그럼.. (사이) 손 잡아도 돼?

유진 : (단호하게) 안 돼.

현수 : 치사하다.

유진 : (웃음) 나 들어갈게, 잘 가!

현수 : 내일 아침 다섯 시 반, 잊지 마!

유진 : (멀어지며) 알았어, 얼른 들어가!

현수 : (멀어지는 유진에게) 너 들어가는 거 보구.


유진 혼잣말 : 아우... 떨려 죽는 줄 알았네.. 나 얼굴 빨개진 거 아니야? 현수가 나 떨고 있는 거 알아챘으면 어떻게 하지?

현수 혼잣말 : 치.. 손 한 번만 잡아주지.. 의외로 독한 구석이 있네.. 하아.. 내일 아침까지 어떻게 기다리냐..


E. 음악


#8 산책


E. 음악 멈추고 새벽 새소리, 풀벌레 소리 들린다.



현수 : 어제.. (잠시 망설이다) 그.. 뜀틀 하다.. (풋. 하고 웃음이 터진다.)

유진 : 너.. 웃지 마라..

현수 : 아, 미안..


현수 혼잣말 : 뜀틀 하다 넘어진 건 아니었잖아.. 아.. 뭐라고 해야 하지?


현수 : (목을 가다듬고) 그.. 뜀틀 하다 다친 건.. 괜찮아?

유진 : (무뚝뚝하게) 안 다쳤어..

현수 : (무안한 듯 하지만 안심하며).. 어.. 다행이다..

유진 : 뜀틀이 다쳤지..

현수 : (웃는다)

유진 : (같이 웃는다)



E. 바람 분다



현수 : 어제.. 나 한 시간 기다리다 학교 갔다.

유진 : 미안.. 나 늦잠 자서.. 학교도 늦을 뻔했어. 헤헤..

현수 : 괜찮아. 키스해 주면 용서해 줄게.

유진 : (단호박) 됐거든.

현수 : 너무해.

유진 : 아침이라 쌀쌀하다.

현수 : (유진 옆으로 바싹 다가가는 호흡) 이렇게 내가 가까이 가면.. 하나도 안 추울 걸.



유진 내레이션 : (호흡) 내 옆으로 바짝 다가온 현수는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길고 단단한 팔은 따뜻했지만 나는 갑작스러운 현수의 행동에 숨이 막혀와 그만 그 팔을 뿌리치고 말았다. 


유진, 현수 : (동시에 어색한 호흡)



현수 혼잣말 : 너무.. 예고 없이 들이댔나..?

유진 혼잣말 : 너무.. 매정하게 뿌리쳤나..?


현수, 유진 : (동시에) 저기..


현수 : 먼저 말해.

유진 :..

현수 : 괜찮아, 말해.

유진 :... 손.. 잡고.. 걸을까?


E. 음악


현수 내레이션 : 새벽 공기는 맑았다. 점점 밝아지는 남색의 하늘이 예뻤다. 회색빛 건물들이 차차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나는 이 순간이 마치 사진인 것처럼 머릿속에 박혔다. 새소리와 우리 둘의 발자국 소리는 내 귓속에 저장되었고, 서늘한 아침 냄새는 익숙한 향수처럼 감각으로 기억되었다.


유진 내레이션 : 현수의 손은 크고 따뜻했다.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을까 불안한 만큼 잡은 손을 놓고 싶지 않은 마음도 컸다. 새벽이 서서히 아침으로 변해가는 시간이면 나는 나도 모르게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졌다. 우리는 산책을 하듯 사랑을 했다. 길모퉁이를 돌아 걷고 또 걸으며.. 서로의 상상 속에서 수많은 말들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서로를 궁금해하며 조용히 사랑하듯 산책을 했다.


현수, 유진 함께 : 첫사랑이었다.




E. 음악 커지며 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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