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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유JiYou Jan 07. 2022

어느새 포근한 겨울

E. 지하철 플랫폼 배경 소음


남자 : (헐레벌떡 뛰어 오며) 잠깐만요!

여자 :.... (뒤를 돌아보는 호흡)

남자 : 이거.. 떨어뜨리셨어요.

여자 : 아... 어머, 아 네, 감사합니다!

남자 : 저.. 그럼..


E. 지하철 지나가는 소리


여자 : 저기요!

남자 :... 네?

여자 : 저.. 잠시 시간.. 괜찮으세요?

남자 : 네, 네?

여자 : 제가 어딘가 가야 하는데.. 혼자 가기.. 싫어서요.

남자 : ………… ??!!

여자 : 저.. 도를 아십니까.. 뭐 그런 건.. 아니에요.

남자 : 아니.. 그게 아니라..

여자 :...


남자 독백 : 세련되게 차려입은 여자는 어딘지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장갑을 주워주었을 뿐인데.. 어디를 가야 하는데, 혼자 가기가 싫다니 대체 이게 무슨 소리지?


남자 : 저.. 절 아세요?

여자 : 아뇨.

남자 : 그런데 겁도 없이.. 저를 데리고.. 어딘가 가고 싶으시다고요?

여자 :..

남자 : 모르는 남잔데?

여자 : 제 장갑. 주워주셨잖아요.

남자 : 그게 무슨 상관이죠?

여자 : 착한 분이실 거 같아서요.

남자 : 하.... 아아...


E. 다시 한번 지하철 지나가는 소리


남자 : 저기요.. O.L.

여자 : O.L. 안 내키심, 됐어요.


남자 독백 : 딱히 약속이 있었던  아니었다. 오랜만에 교보문고에 가려했었다. 무언가 이상했지만 나는 뒤돌아 혼자 가려는  여자에게 소리쳤다.


남자 : 가, 같이.. 갈게요. 같이 가요.

여자 : (웃으며) 그래요, 그럼.



E. 유쾌한 음악


남자 독백 : 지하철 밖으로 나온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여자는 앞장서 걸었고 나는 뒤따라 걸었다. 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 곁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자 그녀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남자 : (부딪힐뻔한 호흡) 어후, 갑자기 멈추면 어떡해...

여자 : (아무렇지 않게) 시간 맞춰 잘 왔네요.

남자 : 네? 여기가.. (두리번거리며) 여기가 어딘데요?

여자 : 영화관이요.

남자 : 영.. 화.. 관.. 영화관이었어요? 갈 때가?

여자 : 네.

남자 :...?

여자 : 왜요?

남자 : 아니..

여자 : (태연하고 단호하게) 이 영화.. 꼭 보고 싶었어요. 혼자 보기 싫었는데.. 마침 같이 와주신다고 하시니..

남자 : 아니, 제가 언제.. 그랬죠.... 그랬네요, 제가.. 그랬어... 그런데.. 영화관일 줄은..

여자 : 지금이라도 싫으면 가세요.

남자 : 아, 아니 그건 아닌데..

여자 : 그럼.. 들어갈까요?



E. 영화관 안으로 들어가는 소음




여자 : (E. 표 기계를 작동하며) 3시 걸로 살게요. 삼십 분 뒤예요.

남자 : 아.. 제, 제가.. 팝콘 살게요.

여자 : (살짝 미소 지으며) 좋으실 대로요. E. 표를 받는 소리

남자 : 아.. 네. 아, 근데 저.. 이 영화를 꼭 보고 싶었던 이유가.. 있나요?

여자 :... 그건.... (많이 망설인다.)

남자 혼잣말 : 내가 괜한 걸 물어봤나..?

여자 :.. 음...

남자 : 아, 그.. 불편하시면 그냥.. 안 하셔도 됩니다. 네..

여자 : (잠시 후 용기 내어 단호하게) 제 약혼자가.. 같이 보자고 했던 영화예요.

남자 : 아.. 그런데... 왜..

여자 : 얼마 전에 파혼했어요.

남자 : (당황한 호흡) 어이쿠.. 아유.. 야.... 아.. 죄송합니다.

여자 :... 괜찮아요, 이젠.

남자 : 그래도.. 지금.. 많이 힘드실 텐데..

여자 : 그래도 이 영화는.. 보고 싶었어요.

남자 : 아 네... 저도 보고 싶던 겁니다, 이 영화. 하하.. 네..

여자 : (웃음) 잘 된 거네요 그럼.

남자 : 잘 됐네요. 하하, 아하하하 (속없이 웃는다)



회상 (영화의 한 장면인 듯 다른 배우들의 연기)


미희 : 오빠. 진짜 이럴 거야?

정욱 : 미안하다, 미희야.

미희 : (한숨) 어머니가 나 마음에 안 들어하시는 거.. 이제 알았어? 처음 인사드릴 때부터 알고 있었잖아.

정욱 : 그땐 시간 지나면 다 괜찮아질 줄 알았지.. 나도 이렇게 끝까지 반대하실 줄은 몰랐어..

미희 : 오빠, 마마보이였어? 왜 이렇게 못났어 진짜?

정욱 : 너 오빠한테.. 니가 이렇게 니 멋대로니까 우리 엄마가 널 싫어하지. 니 잘못도 있는 거야, 알어?

미희 : 허.. 그래.. 내가 나쁜 년이지? 내가 처음부터 이랬어? 어? 내가 처음부터 이렇게 막 나갔냐고?

정욱 : 그래도 나도 너랑 잘해보려고 일단 약혼 먼저 한 거였어. 그러는 동안 엄마 마음 돌리고 기분 좋게 결혼하고 싶었다고... 근데.. 이렇게는 아닌 거 같다. 미희야. 미안해. 어? 미안하다.

미희 : 하... 참... 결혼이 애 장난도 아니고.. 이렇게 그냥 쉽게 무효야? 그럼 우리 이제 뭐야? 이렇게 끝나는 거야?

정욱 :.. 끝.. 나는 건 아니야.. 그냥 다음 달 결혼을.. 미루자는 거지. 야, 미희야.. 꼭 다음 달에 결혼할 필요는 없잖아, 응? 이번 예약 취소하고, 더 좋은 날짜 받아서 O.L.

미희 : O.L. 그게 지금 벌써 두 번 째야! 내 생각은 안 하니? 내 가족 생각은 안 해? 내 친구들은? 내 직장 동료들은?? 청첩장 찍고 버리는 게 재밌니? (소리를 빽 지른다) 결혼이 무슨 장난이야?

정욱 : (같이 소리 지르며) 그래! 나도 이제 지긋지긋하다, 나라고 재밌겠어? 나라고 이 모든 게 다 좋겠냐고오!? 아유... 야, 그래. 그만 끝내자. 나도 더 이상 못하겠다. 결혼도 하기 전에 벌써 지옥이야, 지옥! 나도 못 해, 나도 이제 더 이상은 못한다고!


[회상 끝]



남자 독백 : 여자는 영화를 보면서 우는 것 같았다. 깜깜한 영화관 안에서 자세하게 볼 수 없었지만.. 곁눈질을 하며 본 그녀의 손동작은 눈물을 닦고 있는 게 틀림이 없었다.


E.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 소리


여자 : 별로 안 무섭네요. 그쵸? 무슨 공포영화가 이렇게 안 무섭담..

남자 : 그러게요. 저는 그냥 로맨스 영화인 줄 알았어요. 그리고 저 이래 봬도 해병대 출신이에요, 귀신 잡는 해병대.. 에이, 이런 건, 하나도 안 무섭지..

여자 : (웃으며) 다행이네요 그럼..

남자 : 오늘 밤엔.. 엄마랑 같이 자려고요.

여자 : 아하하하....


남자 혼잣말 : 어.. 웃었다. 성공..


남자 : 아.. 이 팝콘도.. 살 필요가 없었네요. 아니, 뭐.. 사방에서 막 날아와 그냥.

여자 : 아하하하 O.L.

남자 : O.L. 이거 이거, 내가 다 먹었는데 다시 새것처럼 채워진 거 보이죠?

여자 : 아하하하, 그만 해요, 너무 웃겨 아하하하 (계속 웃다가 갑자기 정색하며) 아.. 근데 혹시.. 마마 보이세요?

남자 : 네? (잠시 생각) 아, 아뇨! 아이.. 웃기려고 그런 거죠, 웃기려고..

여자 : (다행인 듯 이어서 웃으며) 그러게요, 성공하셨네요. 풉...

남자 : 그렇습니까? 하하.. 제가 좀.. 하죠? 하하하

여자 : (웃으며) 네..


(남자, 여자 한참 함께 웃는다.)


여자 : (웃음을 지우려 목을 가다듬고)... 이름이.. 뭐예요?

남자 : 아... 김용우..입니다..

여자 : 서미희..라고 해요.

남자 : 아, 네.. 반갑습니다.

여자 : 반가워요.


남자 독백 :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뭔가 뻘쭘해서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고, 어느새 어둑해진 풍경을 바라보며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다시 침묵을 깬 건 그녀였다.


여자 : 집이.. 어디예요?

남자 : 신림동이요.

여자 : 그래요? 저도 신림동 사는데.. 아까 그럼... 신림동에서 오시는 길이었어요?

남자 : 네. 2호선 타고 강남역에서 내렸죠.

여자 : 아니, 그럼.. 집이 이쪽이 아니라.. 신림동이라고요?

남자 : 네.

여자 : 그럼.. 이쪽으로 오셔서 보실... 일이... 있으셨겠네요?

남자 : 그랬죠.

여자 : 아니.. 그럼.. 왜 아까 거절하지 않으셨어요?

남자 : 미희 씨가 예뻐서요.

여자 : 네?

남자 : 이렇게 예쁜 여자가 겁도 없네, 싶어서요.

여자 :...(기가 찬다)

남자 : 겁도 없이 아무 남자한테 어딜 가자고 하네.. 이 여자 큰일 날 여자네.. 내가 지켜줘야겠다.. 싶었어요.

여자 :... 무슨 오지랖이세요..?

남자 : 에헤? 지금.. 잘 해준 사람한테 못난 소리 하시는 거예요?

여자 :... 약속이 뭐였는데요?

남자 : 별 거 아니었어요.

여자 :... 여자.. 친구.. 만나러 가셔야 하는 거 아니었어요?

남자 : 여자 친구 없어요.

여자 : 아.. 그럼.. 그냥 친구, 친구 만나러 가는 길 아니었어요? 주말이었는데..

남자 : 그런 건.. 어딜 같이 가자고 부탁하시기 전에... 생각을 하셨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여자 :.. 네... 그렇긴 하죠.. 아깐 제가 좀.. 제정신이 아니었어서..

남자 : 그래 보이더라고요.

여자 : 뭐라구요?

남자 : 아니이.. 장갑도 막 흘리고 다니고.. 주워준 사람한테 어디 가자고 막.. 그러고..

여자 : 돌아이..인 줄 아셨겠네요?

남자 : 아닌가요?

여자 : 아하하하하하

남자 : 아이.. 그건 아니고.. 그냥.. 뭔가.... (사이) 환기.. 가 필요한 것 같았어요.

여자 : 환기... 요?

남자 : 음... (생각하다) 아픔이나 슬픔... 우울감 같은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 보면.. 환기가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거기서 스스로 빠져나오는 건 어려운 일이구요.. 하지만 미희 씨는 아까.. 용기를 냈잖아요.

여자 :...

남자 : 모르는 사람한테 영화 보러 가자고 할 만큼 큰 용기를 낸 거니까.. 그만큼 환기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게 아닌가..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게 제 마음을.. 움직였나 봐요. 미희 씨의 그 절실한 용기.. 뭐.. 솔직히 처음엔 그냥.. 어리둥절했죠, 저도..

여자 :...


남자 독백 : 여자는 또 한동안 말이 없었다. 코가 빨개지는 것이 울음을 참고 있는 거 같기도 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 게 미안해 다시 주위를 한번 빙 둘러보았다. 오늘은 웬일인지 포근한 겨울 날씨였다. 언제 이렇게 날이 풀렸지?


여자 : 집에.. 뭐 타고 가실 거예요?

남자 : 전철 타야죠. 지금 이 시간에 택시 타면 큰일 납니다.

여자 : 그럼.. 지하철 타러 가요. 저기.. 2호선.

남자 : 그럴까요?



E. 잔잔한 음악 배경으로 흐른다. 지하철 역까지 걸어가며 대화하는 두 사람, 점차 멀어지는 느낌으로.


남자 : 신림역 앞에 곱창집 유명한데 있는데..

여자 : 어, 저도 거기 아는 곳 같아요.

남자 : 그럼.. 거기서.. 저녁 먹고 들어가실래요?

여자 : 그래요. 제가 살게요.

남자 : 아니요, 영화도 보여주셨는데 제가 사야죠.

여자 : 대신 팝콘 사셨잖아요.

남자 : 에이, 그거 다시 사람들이 다 리필해줬잖아요.(여자 웃는다) 그냥 다시 갔다 줬어요. 물렀어요, 물렀어. 환불.

여자 : (웃으며) 아재 개그가 좀.. 있으신 거 같아요.

남자 : 에에? 아재 개그에 웃으시는 미희 씨는 그럼.. 아재 개그를 무척 좋아하시는 거 같네요.

여자 : (웃는다) 아, 그런데..

남자 : 네.

여자 : (여기부터 본격적으로 둘의 대화 멀어지기 시작) 진짜.. 오지랖이 좀.. O.L.

남자 : O.L. 아, 진짜..

여자 : 아, 그렇잖아요.. 같이 가잔다고 진짜 같이 가냐.. 모르는 사람인데..

남자 : 제가 같이 안 갔으면 어쩔뻔했어요? 뭐, 혼자 가시게?

여자 : 그럼요, 혼자 가려고 왔는데..?

남자 : 에이~ 아냐 아냐, 혼자 못 갔을 거예요.

여자 : 풋, 그걸 어떻게 장담해요?

남자 : 혼자 갈 얼굴이 아니었어.

여자 : 지금 반말하시는 거예요?

남자 : 아뇨 아뇨, 그건 아니구요... 아이, 제가 같이 가서 든든했잖아요.

여자 : 네.. 그렇긴 해요.

남자 : 보고 싶던 영화도 보고.

여자 : 그러니까요.

남자 : 아.. 나 오늘 엄마랑 같이 자야지.

여자 : 아하하하, 마마보이 맞는 거 같아요!

남자 : 아이, 아니라니까요


에드립 하다가 페이드 아웃 


E. 음악 커지고, 지하철 지나가는 소리 잠시 들리며 엔딩


여자 독백 : 그렇게 어느새, 포근한 겨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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