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만나지 않은 그때 내 삶은 볼품없었겠지
모에게.
1.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몇 가지 단어만으로 정의하기 가장 쉬운 사람. Artistic, iconic, colorful, lovable. 2분 거리에 살던 때가 있었는데 못 본 지 2년이나 되어가. 신기하게 너를 마지막으로 본 지 한 달이 되었을 때에도 지금과 비슷한 느낌이었어. 영영 못 볼 것 같은 느낌.
2. 너와 마지막으로 통화하잔 말을 나눈 건 3월이었어. 이젠 너와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 네가 대학원 2년 차라는 것도, 네 생일인 3월에 맞춰 보낸 나의 축하 문자 겸 안부 인사가 아니었으면 몰랐지 않았을까. 망설이다 보낸 그 문자를 보고 네가 페이스타임 걸었을 때에야 들었잖아. 하필이면 서순라길에서 웨이팅 할 때 받아서 통화가 3분을 채 넘기지 못했지만. 4년 전에 우리가 친구들과 지나온 시간들이 너무 귀하고 고통스러워서 떠올리는 것조차 힘겹잖아. 그렇지? 존은 마을을 떠난 모두가 같은 증상을 겪고 있는 것 같다고 했어. 그도 그럴 것이, 당시의 우리들은 서로 말고는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었잖아. 걱정은 모두 미래를 향하고 있었지. 우리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면?
3. 너를 처음 만난 순간은 그 어떤 첫 만남보다 신비로웠어. 클라이밍 동아리의 하반기 캠핑 트립. 큰 바위에 앉아서, 바위 틈새에 손과 발을 간신히 넣고 딛고 오르는 친구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톤 다운된 무지개색 스트랩을 어깨에 두르고 지나가던 네가 갑자기 멈춰 서서 나를 향해 카메라 렌즈를 들이댔어. 사실은 캠핑 내내 네가 걸어 다니는 곳만 유독 색채 높아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사진을 찍고 날 향해 싱긋 웃는 너에게 말을 안 걸 이유는 없었어. 웬만하면 가지 않았을, 아무도 모르는 동아리의 행사에 그날따라 일단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던 건 너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난 그곳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발걸음을 가지고 태어난 거지.
4. 분명히 하자. 우리가 서로를 이성적으로 본 적은 없었고, 확률 또한 없었어. 성적 지향이 명확히 달랐잖아. 그렇지만 너에게 서운한 일들이 늘어갈 때마다 너를 향한 사랑을 느꼈어. 그러자 의문이 생겼지. 사랑인 것 같은데, 어떤 사랑일까?
5. 뉴욕으로 같이 떠난 우린 차이나타운에서 딤섬을 시켰어. 대기 시간이 길어지자 문득 떠올라서 물었어. 혹시 배우가 되고 싶었던 적은 없냐고. 표현하기 어려운 너의 쪼와 유행어는 연극배우의 그것과 닮아 있었어. 세상의 온갖 것들을 남들보다 먼저 감지하고, 그 예민함을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데 쓰는 사람. 다양한 표현법을 몸 곳곳에 지니고 적재적소에 꺼내어 쓰는 사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어?
6. 너와 편한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이 좋고도 후회됐어. 친한 친구라는 이유로 각종 파티나 이벤트에 같이 다닐 때, 너의 살가움을 받는 ‘처음 만난 사람’이 부러웠어. 처음 만났을 땐 낯섦을 이유로 다정했지만 가까워질수록 서로에게 투정 부리고 틱틱거렸잖아. 삼 남매 중 장녀인 내 눈에는 삼 남매 중 막내아들인 네가 어떤 점에서 긁히는지 금세 보였지. 그렇지만 너는 나보다 꼼꼼하고, 깨끗하고, 절대 길을 잃지 않았어. 내가 파악할 수 없고 묶어둘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자 불안해졌어. 나의 구질한 모습까지 이미 들켜서, 질려서 떠나지 않을까. 나보다 우선인 친구가 생긴다면.
7. 친구를 만들기만 하면 서로에게 소개해버려서 겹치는 친구들이 많았던 우리는 사려 깊음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눴어. 다른 나라와 문화권에서 다른 성별로 자랐지만 사려 깊음의 임계점이 비슷해서, 낯선 문화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길 때 우리만 공감할 수 있는 그런 말들.
8. 너와 친해질수록 서운한 일이 늘어났어. 어릴 때부터 어른들에게 지적받았던 내 고집과 예민함을 혐오하게 되어서 내 몸과 마음은 커갈수록 그 성질을 밀어내는 방향으로 자라났는데, 너와 함께할 때 가끔 내 속의 제일 유치하고 못난 마음이 스멀스멀 옛 모습을 드러냈어. 시력 검사할 때 높은 도수의 렌즈가 씌워지면 간혹 선명해지듯이, 내 예전 모습이 선명해질 때마다 쥐구멍에 숨고 싶었어. 너도 그런 적이 있었을까. 너와 다툰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은 그런 일이 있었어도 서로를 속상하게 하는 말만큼은 할 수 없었기 때문일 거야.
9. 네가 떠나는 날, 일 년 동안 너와 가족이 된 친구들과 너의 남자친구는 당연한 듯이 공항으로 향했어. 그들을 모두 태우려면 차가 세 대나 필요했잖아. 게이트 앞으로 우르르 걸어가서 가로로 죽 서서 훌쩍이는 우리가 참 볼만했겠지. 거봐, 너의 살가움으로 너의 세계에 일단 발을 들인 사람들은 금세 너라는 사람과 서사에 몰입하게 돼. 일 년을 머물렀지만 너는 그 마을에 가족을 만들었지. 네가 그들과 평생 행복하게 살았대도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걸. 그 마을에서 때가 되면 떠나는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았는데, 네가 떠나는 일은 우리의 시대가 저물어감을 의미했으니까.
10. 너를 만나지 않은 내 삶은 얼마나 볼품없었을까?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 자꾸 독일로 이사 가고 싶어지는 이유는 네가 그곳에 있어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