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지로의 꿈’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같은 자리에서 ‘스시’를 만들어온 지로. 매일을 한결같이 살아내는 그와 그의 아들, 제자의 모습이 업이란 무엇인가, 일이란 무엇인가 되돌아보게 했다.
프로덕트 디자이너, UX 디자이너, IT 서비스 디자이너 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직업. 공과 대학 학생으로 입학했던 내가 디자인이라는 분야를 알게 됐고, UX 분야에 매료되어 지금은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내가 선택한 직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프로덕트 디자이너라는 직업적 특성, 일하는 환경적 특성이 나라는 사람을 많이 바꾸었고 형성했다. 여전히 나의 업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나의 업이 나라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고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되돌아본다.
모든 인간은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창작 욕구가 있다고 한다. 나는 어릴 적부터 그런 욕구가 꽤나 높은 어린이였고 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실험하는 것을 참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내가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택하게 된 이유는 내가 가진 생각, 아이디어를 표현할 수 있으며 사용자에게는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훌륭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글로 전달하면 작가일 것이고, 사진으로 전달하면 사진작가일 것이고, UXUI 디자인으로 전달하면 프로덕트 디자이너가 될 것이다.
회사에서는 가치와 수익을 만들어내기 위한 특정 목적을 가지고 디자인하지만, 내가 무언가를 그려내고, 글로만 존재하던 것을 가시화하고, 개발되어 결국에는 필요로 하는 사용자에게 쓰인다는 행위 자체가 주는 기쁨이 있다. 대학생 때는 항상 그림으로만 남아 사라지는 게 참 아쉬웠는데, 처음 일을 시작하고 나서 고심해서 그려둔 시안이 다음 날 개발되어 실제 동작할 때의 짜릿함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디자이너로 일을 하면 평생 학습이 당연해진다. 내가 맡는 프로덕트를 제대로 디자인하기 위해서는 서비스를 사용하는 사용자, 사용자가 일하는 환경, 그들의 불편함과 필요를 끝까지 파헤치고 학습해야 한다.
학생들에게는 절망적일지도 모르겠지만 ㅎㅎ 인생은 죽을 때까지 배움의 연속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말에 동의한다. 졸업한다고 공부가 끝나진 않는다. 요새 나는 초중고대학교를 통틀어 그 어느 때보다 즐겁게 그리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디자이너라는 업을 하면서 무언가에 대해 리서치하고, 직접 경험해 보기도 하고, 찾아가서 묻는 것이 자연스러워져서인지 디자인을 넘어서서 내가 관심이 가는 것을 찾아 공부하는 과정도 굉장히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느껴진다. 무언가를 배우고 적용해 보고 실패하고, 다시 배우는 그 과정이 즐겁다.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시간이 지날수록 전문성이 쌓인다. 일하는 회사나 분야에 따라 특성은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더 나은 사용자 경험’이라는 궤를 같이한다. 매일, 매달, 매년이 사용자 경험 전문가가 되어가는 여정이다.
그래서 ‘퇴직하면 뭐 하지’라는 고민이 ‘뭐 먹고살지’라는 고민이 아니라 정말 ‘어떤 멋진 제품, 서비스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된다. 개인적으로 지금은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지만 미래에 상황이 갖추어졌을 때 창업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는데, 그런 꿈을 꿀 수 있게 하는 밑바탕에는 어떤 회사에 가서든 또는 어떤 상황에서든 활용할 수 있는 직업적인 전문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점이 참 감사하다.
디자이너라는 업이 내 삶에 미친 영향 중 가장 감사한 점이 있다면 바로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피드백’이다.
디자인을 할 때는 여러 가지 시안을 그려 팀원들에게 각 시안에 대한 장단점 피드백을 받고, 피드백을 바탕으로 계속해서 개선하는 작업을 거친다. 내보내고 난 이후에도 실사용자로부터 어떤 점이 좋고, 어떤 점이 불편한지 끊임없이 귀를 열고 피드백을 듣기 위해 노력한다.
인간은 모두 다 자신을 보호하려는 울타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한 행동이나 말에 대해 지적받았을 때 수용 이전에 반발심을 가지기도 한다. 사실 특히 내가 그랬다. 하지만 피드백을 구하고, 주는 과정을 수도 없이 반복하면서 디자인에 대한 피드백이 ‘나를 향한 비판’이 아니라 우리의 제품을 더 나아지게 하려는 노력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됐고, 피드백을 받고 누군가에게 솔직한 피드백을 주는 것이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피드백의 대상이 작업물이 아닌 나 자신 또는 함께 일하는 팀원처럼 사람이 됐을 때 ‘좋은’ 피드백을 주고받기란 매번 어렵지만 그럼에도 디자인을 하며 주고 받은 피드백 과정들이 피드백 자체에 대한 나의 인식과 태도에 큰 영향을 주었음은 틀림없다.
글을 적으며 내가 디자이너라는 업의 이런 점을 좋아하고 사랑하는구나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더불어 요새의 고민과 흥미는 ‘디자이너 넘어 문제 해결자’가 되는 것이다.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가끔 문제의 해결이 디자인 자체보다 디자인 밖에 있는 경우를 마주하곤 한다. 서비스 화면을 만나는 그 순간뿐만 아니라 전후의 전체 플로우를 개선하고 안내해야 하는 경우, 화면에 그려내기 위한 정보 수집 및 관리 방식 자체를 바꿔야 하는 경우가 그렇다. 때로는 문제 정의부터 다시 해야 할 수 있고, 디자인 이전에 현 상태와 제약 사항을 더욱 깊고 현실적으로 파악해야 하기도 한다. 이런 게 화면 디자인보다 중요한 키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앞으로 나는 디자이너를 넘어 문제 해결자가 되고 싶다. 또는 내 마음속 ‘디자인’의 정의가 한 층 더 확장된 것일 수도 있겠다. 앞으로 살아가며 '디자인', 그리고 '디자이너'라는 업이 삶 안에서 어떻게 이어지고 확장될지 기대되는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