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너랑 노는 게 제일 재밌어

작고 평범한 말이 오래 남는다.

by 김지윤

그 말이 위로가 되기까지의 시간


아주 평범했던 어느 저녁이었다. 하루 종일 하나부터 열 가지 맘에 들지 않는 하루였다. 출근길엔 덥고, 퇴근길엔 몸과 마음이 지쳐서 집으로 걸어오는 그 길이 멀게만 느껴지는 하루였다. 퇴근 후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문득, '오늘 하루 나는 진짜 웃었던 순간이 있었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어쩌면 아무도 모르게 내 마음은 조금씩 바스러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었을 때, 익숙한 밥 냄새가 났다. 부엌에서는 달그락 소리가 났고, '엄마~~ 지윤이 왔다~~', 소리에 한 걸음에 달려와 세상 밝은 미소로 날 반겨주는 엄마. 그 순간, 어딘지 모르게 고였던 마음의 피로가 조금 녹는 기분이었다. 엄마가 차려준 따뜻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차려진 밥상이 그날따라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엄마와 함께 TV를 보면서 밥을 먹던 중에 엄마가 말했다.


"나는 너랑 이렇게 밥 먹고 수다 떨고 노는 게 제일 재밌어."


나는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 여느 때와 같이 '나도! 엄마랑 노는 게 제일 재밌어.' 웃으며 넘겼지만, 그 말은 자꾸 마음에 남았다.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진 그 한 문장. 이상하게도 오래도록 마음에 맴돌았다.


아무렇지 않게 남은 말 한마디


그날 밤, 씻고 누워서도 그 말이 자꾸 생각났다. '너랑 노는 게 제일 재밌어.', 노는 거라니, 엄마랑 나는 함께 밥 먹고, 맥주도 마시기도 하고, 함께 드라마를 보며 수다 떠는 게 전부인데. 생각해 보니 그게 다였다. 엄마의 하루는 내가 퇴근하고 집에 오는 그 시간부터 시작되는 것 같았다. 쉬는 날이면 하루 종일 혼자 계셨을 텐데, 나는 그걸 자주 잊고 살았었다. 엄마가 '노는 게 재밌다'라고 말한 건, 그만큼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이 특별하다는 뜻이었을 거다. 근데 나는 그때는 몰랐다. 그냥 농담처럼 흐려 들었고, 내 마음을 흔들기엔 너무나 가벼운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그 말 안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는지를.


엄마는 점점 작아지고, 나는 더 장난을 건넨다.


아빠가 돌아가신 지 몇 해가 흘렀다. 그 후로 엄마는 조용해졌고, 나는 말이 더 많아졌다. 나는 퇴근하고 들어와 일부러 장난을 많이 걸었다. "엄마, 유튜브 보고 있었지.", "엄마, 나 오늘 삼겹살에 쏘맥 먹고 싶어.", "엄마 오늘 있잖아, 누가 이렇고 저렇고.". 엄마 좀 그만 부르라고 할 정도로 엄마의 뒷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엄마에게 장난을 쳤다. 내가 그렇게 말 걸고 장난을 치는 건, 엄마가 웃어주기를 바라서였다. 더 어린애처럼 굴었다. 왜인지 아직도 나는 엄마의 아이이고 싶어서다. 엄마 품은 여전히 포근하고, 엄마의 밥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고, 엄마의 말 한마디가 제일 큰 위로니까. 그런데도 가끔 엄마가 부쩍 작아 보인다. 마트에서 무거운 장바구니를 내가 두 개 들고, 엄마는 하나만 드는 날이 많아졌고, 걸을 때도 가끔은 멈춰 숨을 고르기도 한다. '엄마가 점점 나이가 들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가는 순간들이 늘어가지만, 나는 여전히 엄마의 손길에 닿고 싶어서 오늘도 장난을 건넨다.


그 말이 품고 있던 마음


‘너랑 노는 게 제일 재밌어.’

그 말속엔 단순한 즐거움 이상의 것이 있었다. 사실 엄마가 ‘노는 게 재밌다.‘고 말한 건, 내가 있어서 덜 외롭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세상과 멀어진 자리에 내가 들어와 있다는 안도감.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다시 찾은 웃음. 그리고 내가 엄마의 하루를 함께 채워주는 사람이라는 사실. 나는 엄마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말 한마디가 내 존재가 위로였다는 걸 알려줬다. 나는 언제나 엄마의 밥상으로 말 한마디에 위로받는 쪽이라 여겼는데, 엄마에게도 내가 위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말은 가장 작고, 가장 큰 위로다.


살다 보면 어떤 말은 머리에 남고, 어떤 말은 가슴에 남는다. 엄마가 한 그 말은 확실히 후자였다. 그저 식탁에서 평범한 대화를 하다가 나온 한 문장이었는데, 그게 내 하루를 따뜻하게 바꾸고, 내 마음을 깊게 흔들었다. 위로는 대단한 말에서 오지 않는다. 때로는 “괜찮아”, “수고했어”, “밥 먹자”, 그리고 “너랑 노는 게 제일 재밌어” 같은 아주 단순한 말들이 오히려 위로가 된다. 그 말 안에서 ‘나는 네 편이야‘, ‘네가 있어서 좋아. “ ‘내가 너를 좋아해 ‘라는 수많은 감정이 스며있다. 엄마는 말이 많지 않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 말 한마디는, 그 어떤 긴 편지보다 따뜻하다. 그날 이후 나는 궁금증이 생겼다. 내가 엄마에게 해준 말들 중에, 엄마 마음속에 오래 남는 말이 있었을까?, 내가 건넨 말들이 엄마에게 위로가 되었던 적이 있었을까?.


아직도 나는 엄마에게 아이지만, 이제는 지켜주고 싶다.


엄마는 여전히 나를 아이처럼 대한다. “운전 조심해라”, “밥은 먹었어?”, “양치하고 자~” 같은 말들을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도 엄마에게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엄마 약 먹었어?”, “엄마 무리하지 마, 장은 내가 보고 올게 “, 라며 엄마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나는 여전히 엄마의 아이지만, 이제는 엄마에게 든든한 존재가 되고 싶다. 엄마가 나를 의지하듯, 나도 이제 엄마를 안아주고 싶다. 엄마가 작아지지 않았으면 좋겠고, 조금 더 오래 나와 ‘노는 게 제일 재밌는 ‘ 시간을 함께 했으면 좋겠다. 나도 언젠가 엄마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이런 말이 너무 늦지 않게, 엄마가 들을 수 있을 때, 엄마의 귀와 마음이 열려 있을 때 조심스럽고도 분명하게 전하고 싶다. 그 문장이 엄마에게도 위로가 되기를. 엄마 마음속에 오래 머무는 따뜻한 말이 되기를.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형태의 위로를 찾을 때가 있다. 하지만 진짜 위로는 늘 가까이에 있다. 익숙한 공간, 사랑하는 사람, 평범한 저녁 식사,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건넨 한 문장. “너랑 노는 게 제일 재밌어.” 그 문장이 내 마음에 오래 머물렀듯, 내가 쓰는 이 글이 또 누군가의 마음에 오래 머무를 수 있기를. 그리고 그 마음이 다시 누군가에게 따뜻하게 해 줄 수 있기를.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위로하며 살아간다. 문장 하나로, 말 한마디로, 따뜻한 눈빛 하나로. 그리고 오늘도 나는 그 말에 기대어 하루를 마무리한다.


엄마, 나도 엄마랑 노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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