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만난 한 문장의 위로
아침부터 몸이 무거웠다. 사고가 난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온몸이 뻐근했고, 목과 어깨는 평소보다 훨씬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부드러운 이불 위에 누워 있어도 몸은 땅속 깊이 내려앉은 돌덩이 같았다. 나는 출퇴근이 가까워서 평소에는 차를 안 쓰고, 쉬는 날에만 차를 쓴다. 그래서 엄마와 내차를 함께 타고 있었기에 엄마는 졸지에 택시를 타고 출퇴근을 하게 되버렸다. 그래서 마음이 더 무거웠다. 사고가 난 날도 엄마의 퇴근시간에 맞춰 모시러 가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다행히 동생이 엄마를 집으로 모시고 와줘서 다행이었지만, 내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럼에도 엄마는 담담한 목소리로 크게 안 다쳐서 다행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은 위로였지만, 내 마음 한쪽에 무거운 돌이 얹히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그 사고가 얄궂게도, 차량 외부 복원을 마친 바로 다음 날 일어난 일이었다. 마치 누군가 나를 골리듯, 깨끗해진 표면 위로 새 흠집을 내 버렸다.
차를 수리 맡기고 나니, 보험회사에서 걸려오는 전화가 하루 종일 이어졌다. 사고 경위, 수리 기간, 대차 여부... 등등 차가 없으니 이동은 불편해질 테고, 그 불편은 고스란히 엄마에게도 전해진다는 사실이 더 마음을 무겁게 했다. 마음도 아팠지만, 어깨와 목이 아파 진료를 받으러 병원에 갔다가 마치고 병원 문을 나섰을 때, 평소 같으면 내가 직업 운전해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다행히 동생이 시간을 내어 데리러 와 주었다. 동생 차 조수석에 몸을 기댔다. 자동차 시트에 등을 붙이는 순간, 작은 진통이 어깨를 타고 목까지 번졌다. 동생은 집으로 가는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차를 틀었다. 왜 이쪽으로 가냐 물었더니, 방지턱 없는 길로 가려고 그랬다고 하는 말에 울컥 감동했다. 나는 그럼 이 길 중간에 있는 빵집에 들르자고 했다. 평소 내가 자주 가는 빵집이었다. 크루아상과 에그타르트 맛집이었다. 동생과 함께 커피를 마시면서 먹자고 했다. 빵을 사고 나오는 순간 반대편에 동그란 모양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배경에, 검은 손글씨 모양으로 쓰인 다섯 글자와 네 잎클로버.
뜻밖의 기쁨
순간, 시간의 속도가 느려졌다. 그날 처음으로, 무겁던 마음에 아주 작은 금이 갔다. 이상했다. 별것 아닌 문장이었는데, 그 다섯 글자가 나를 붙잡았다. 몸은 불편하고, 마음은 잔뜩 예민해져 있었다. 하루 종일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긴 건지, 하필 복원한 다음날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하는 생각만 되풀이하고 있었는데, 그 문장을 보는 순간, 내 생각과 감정이 달라졌다.
좋은 일도, 안 좋은 일도,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고 피할 수 없다.
사실 당연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당연한 사실을, 나는 사고가 나기 전까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늘 예측 가능한 하루를 살고 있다고 믿었다. 정해진 루틴, 반복되는 일정, 익숙한 동선 속에서 안전하게 걷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삶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나쁜 일은 예고 없이 찾아오고, 좋은 일도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날 내가 간판에서 받은 건, 단순한 진리였다. 그리고 위로.
간판은 스쳐 지나가며,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뜻밖에.."
집에 가는 길, 차창 밖의 풍경이 조금 달라 보였다. 회색빛 도로 위에 내려앉은 햇빛, 가로수 가지 사이로 흘러드는 바람, 멀리서 걸어오는 노부부의 나란한 발걸음. 여전히 세상은 나쁜 일과 좋은 일이 섞여서 지나고 있었다. 사고가 난 건 분명 불행이었지만 그 속에도 다행은 있었다. 엄마가 운전하고 있던 게 아니었다는 것과 동생이 시간을 내어 나를 데리러 와준 것. 그리고 원래 가던 길이 아닌 곳에서 '뜻밖의 기쁨'이라는 문장을 만난 것. 불행으로 시작했지만, 다행과 안도 그리고 위로까지 만난 것. 이 모든 게 뜻밖의 선물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니, 내 삶 속에도 그런 순간이 많았다. 버스를 놓쳐서 짜증 났지만, 그 덕분에 길에서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던 날. 약속이 취소되서 혼자 카페에 갔다가 뜻밖에 좋은 책을 발견한 날. 처음에는 불편과 실망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 보니 기쁨이 숨어 있던 순간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서도 '뜻밖의 기쁨'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쁜 일은 피할 수 없지만, 좋은 일도 그만큼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걸 기억하며 살아야겠다. 그래야 힘든 날에도 조금은 단단해질 수 있다.
다음 날, 일부러 그 골목을 다시 찾아갔다. 간판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흰색 배경에 검은 글씨는 전보다 더 단단해 보였다. 불현듯 찾아온 문장이었지만, 이날은 조금 더 차분한 마음으로 바라봤다. '뜻밖의 기쁨'은 단순한 다섯 글자가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였다. 나는 작은 메모장을 꺼냈다. 일상에서 만나는 뜻밖의 기쁨의 순간들을 나열해 보았다. 회사 앞 가로수에 핀 첫 벚꽃, 서점에서 들리는 엄마가 아이에게 책 읽어주는 소리. 거기에 행복한 웃음소리로 웃고 있는 아이의 웃음소리까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하루를 버티게 하는 건 이런 조각들이었다. 그것들을 모아두면, 언젠가 커다란 힘이 될 거라는 걸 이제는 안다.
삶은 여전히 예측할 수 없다. 사고도, 이별도, 실패도 뜻밖에 찾아온다. 하지만 그만큼 기쁨도, 위로도, 사랑도 뜻밖에 찾아온다. 나는 이제, 그 사실을 조금 더 믿고 싶다. 그리고 그 믿음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
어쩌면 그날 골목길에서 내가 만난 건, 단순한 간판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내게 주어진 가장 뜻밖의 기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