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서툴러도 사랑은 분명히 있다.
과거를 돌아보면서 나는 화를 잘 내는 사람이었다는 걸부정하지 않는다. 사소한 말에도 욱하고, 억울함이 쌓이면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화는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속에는 슬픔, 서운함, 두려움, 외로움 등 다양한 감정들이 겹겹이 숨겨져 있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느낀 어떤 아픔이나 외로움,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제대로 표현되지 못해 화라는 가장 즉각적이고 강렬한 언어로 나타난 것이다.
드라마 <첫, 사랑을 위하여>에서 지안과 효리가 싸우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표현에 서툰 사람이라는 걸 또 한 번 깨달았다. 지안은 자신에게 엄마라고 대뜸 찾아온 문희에게 화를 내지만, 그 화는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오히려 엄마에 대한 오랜 상처와 상실, 그리고 내면 깊숙한 두려움이 뒤엉킨 감정의 폭발이었다. 딸 효리는 지안의 화를 '화'로만 보지 않고, 그 안에 숨겨진 아픔을 읽어냈다.
화는 감정의 가장 쉬운 표현이지만, 그 뒤에 숨은 마음을 볼 줄 아는 사람에게는 다른 언어로 들린다.
효리의 한마디가 마음에 깊이 남았다. "화난 게 아니라 마음이 아픈 건데,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 줄 몰라서 그냥 화낸 거예요."
화가 아닌 마음의 아픔.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구분하는 데 서툴다. 마음이 아픈 순간을 말로 풀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세상은 우리가 겪는 감정의 복잡함을 늘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주 화라는 가장 강렬하고 직관적인 형태를 빌려 감정을 밖으로 꺼낸다.
나 역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서운함과 상실감을, 화라는 가면으로 숨겨 버린 적이 많다. 친구가 실망시킬 때, 가족에게 이해받지 못했다고 느낄 때, 혹은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외로움을 느낄 때, 나는 종종 화를 택했다. 그 화는 나를 방어하기도 하고, 동시에 나의 아픔을 상대에게 전달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그 화가 진짜 의도한 메시지로 전달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효리의 통찰은 단순한 관찰을 넘어 관계를 읽는 능력이었다. 지안의 화는 결국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마음이 크기 때문에 아픈 순간이 더 크게 다가오는 법, 그 화 속에 숨은 아픔을 읽어내는 사람에게는 화조차도 사랑으로 전해진다는 것. 우리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표현이 서툴러 때때로 화를 내고, 그 화 뒤에 다시 마음이 닿는다. 부모, 현제, 친구, 연인 모두 마찬가지다. 화가 단순한 부정적 감정이 아니라, 더 깊은 애정을 담은 신호일 수 있다는 걸 이해할 때, 우리는 관계 속에서 조금 더 여유를 가지게 된다.
나 또한 글을 쓰며 이런 경험을 자주 했다. 마음을 전하고 싶지만 방법을 몰라 투박하게 표현한 글이나 편지 속에, 친구와 가족은 나보다 더 섬세하게 내 마음을 읽어주었다. 서툰 표현이 오히려 마음을 알아보게 만드는 계기가 된 셈이다.
서툰 표현 속에서도, 마음은 여전히 진심이었다.
우리는 모두 관계 속에서 감정을 배우고, 감정의 언어를 익혀간다. 부모와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동료와의 관계를 거치며,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어떻게 읽을지 배우는 과정이다.
때로는 실수하고 후회하기도 한다. 화를 내고 나서 미안해하고, 지나친 기대를 하며 상처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 과정 자체가 사랑을 배우는 시간이다. 화가 곧 아픔이고, 아픔이 곧 사랑임을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조금 더 단단하고 따뜻한 관계를 만들어간다.
예전에는 나도 화만 보고 마음을 판단하곤 했다. 누군가 화를 내면 "이 사람은 왜 이렇게 화를 낼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뒤에 숨은 마음을 먼저 살피려고 한다. 분노 속에서도 사랑과 걱정을 읽어낼 수 있는 눈을 키워보려 한다.
결국, 서툴렀던 표현도 시간이 지나면 마음에 닿는다. 화로 던진 말이지만 그 안의 아픔을 읽어낸 사람에게는 위로가 된다. 우리가 화를 내는 순간, 누군가가 그 속의 진심을 알아주면, 그 화는 사랑으로 바뀌고, 관계는 다시 이어진다.
나는 이제 화가 올라올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내가 느끼는 건 진짜 화일까, 아니면 다른 감정일까?". 슬픔, 서운함, 두려움, 외로움, 각기 다른 얼굴로 화를 입고 나온 감정을 마주할 때, 나는 그 화를 통해 나 자신을 더 이해하게 된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사람의 화 속에 마음을 읽어내는 것, 그 서툰 감정의 의미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 그것이 관계를 깊게 하고, 서로에게 위로와 다정함을 남기는 방법이다.
화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마음을 꺼내 보이는 시작, 관계를 깊게 만드는 또 다른 언어.
살다 보면 화를 내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부끄러워하거나 억누르려 하지 말고, 그 화 속에 숨은 마음을 찾아보자. 슬픔이라면 솔직히 인정하고, 두려움이라면 받아들이고, 외로움이라면 드러내는 것 그렇게 내 마음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일은, 나 자신과 화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 내 마음을 알아주고, 내가 또 다른 누군가의 숨은 감정을 알아채 준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작은 위로가 되어 줄 수 있다. 결국 화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마음을 꺼내 보이는 시작, 관계를 깊게 만드는 또 다른 언어다.
서툰 감정이지만, 결국 마음은 닿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