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02. 십 년이라는 시간의 흔적

과거의 흔적 그리고 새로운 시작

by 김지윤

어느 날 아침, 창문을 열자 서늘한 가을 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달력은 그날이 친구와 손절 후 정확히 1년이 되는 날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1년. 그 시간은 생각보다 길고도 짧았다. 커피를 내리며 지난 1년을 되돌아보았다. 처음의 혼란과 상실감, 그리고 조금씩 자리를 찾아가는 나 자신. 예전의 나라면 이 날을 우울하게 보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달랐다.


관계의 단절


작별인사를 하지 않은 관계들이 있다. 예고 없이 사라진 사람들. 어느 날 문득, 그 사람의 메시지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함께했던 공간들, 나눈 대화들, 약속들이 천천히 기억의 서랍 깊숙이 내려앉는다. 메아리처럼 울리던 웃음소리가 희미해지고, 자주 들렀던 카페의 의자는 낯설게 느껴진다. 누군가의 존재가 얼마나 일상을 채우고 있었는지는 그 사람이 사라진 후에야 알게 된다.


손절이라는 단어는 날카롭다. 마치 가위로 무언가를 싹둑 자르는 듯한 단호함이 담겨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깔끔하지 않다. 끊어진 관계는 종종 흔적을 남긴다. 마음에 새겨진 흉터처럼, 쉽게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 그 흔적은 때때로 불현듯 찾아와 가슴 한편을 무겁게 누른다. 마치 오래된 사진첩을 발견한 것처럼, 잊고 있던 감정들이 물밀듯 밀려온다. 관계의 끝은 명확한 선이 아닌 흐릿한 그라데이션처럼 서서히 변해간다.


십 년 지기 친구와의 대화가 아직도 선명하다. 햇살이 쏟아지던 카페, 테이블 위에 놓인 두 잔의 커피, 그리고무심코 던진 그녀의 말.

우리는 서로의 일상을 나누며 웃고 있었다. 나는 최근에 겪은 불쾌한 경험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 순간 그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너는 왜 항상 그렇게 예민해?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아 하는데."


그 질문에는 숨겨진 비난이 있었다. 내가 느끼는 것을이 너무 과하다는, 내 반응이 불필요하다는 듯이. 그 순간 카페의 소음이 일시에 멎는 듯했다. 따뜻했던 커피 잔이 차갑게 식어갔다. 무언가 돌이킬 수 없이 깨졌다는 느낌이 나를 감쌌다. 깨진 유리처럼 산산조각 나버린 신뢰. 그 순간을 떠올리면 아직도 목이 멘다. 그때의 문장은 보이지 않는 벽이 되어 우리 사이에 서 있었다.


감정의 무효화와 자기 의심


우리는 자신의 감정이 타당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받을 때, 자신의 경험을 불신하게 된다. 마치 모래성이 파도에 조금씩 무너지듯, 우리의 현실 인식은 천천히 허물어진다. 자신의 감각과 판단보다 타인의 평가와 해석이 더 중요해진다.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된다. 누군가가 우리의 감정을 부정할 때, 그것은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 방식 자체에 대한 거부로 다가온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감정 무효화'라고 부른다.


그날 이후, 나는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정말 내가 지나치게 예민한 걸까? 나의 감정은 실제보다 부풀려진 것일까? 그렇게 자기 검열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매일 밤 잠들기 전, 하루의 말과 행동들을 되돌아보며 자책했다. '이렇게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저렇게 행동했어야 했다.'. 끝없는 자기 의심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내 안의 작은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갔다. 마치 누군가가 내 마음의 볼륨 다이얼을 조금씩 줄여놓은 것 같았다.


매일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나를 지우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방법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감정을 숨기고, 의견을 삼키고, 때로는 존재감까지 희미하게 만들었다. 웃음소리는 있었지만 진심이 담긴 웃음은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였지만 정작 내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원하는 '나'로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점점 더 타인의 기대에 맞추기 위해 내 본래의 모습을 접어두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잃어갔다. 나는 누구의 기대에 맞춰 살고 있는 걸까? 내 안의 진짜 목소리는 어디로 갔을까? 나의 취향, 나의 생각, 나의 감정, 그것을 은 점점 흐릿해졌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도 '이 음악을 좋아해도 괜찮을까'라는 의문이 끊임없이 따라왔다. 내 감정이 유효한지, 내 생각이 의미 있는지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어 했다. 타인의 인정이 없으면 나의 존재가치가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마치 거울 속의 내 모습이 점점 투명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진실과의 직면


시간이 흘러 어느 날, 이사 중에 오래된 일기장을 발견했다. 손때 묻은 표지, 구겨진 모서리 조심스레 펼쳐보니 그 안에는 내가 지워진 순간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3년 전의 내 필체는 지금보다 날카로웠다. 마치 분노와 억울함을 종이에 꾹꾹 눌러쓴 흔적이 보였다.


"오늘도 A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내 의견은 항상 무시된다. 왜 나는 그 순간에 말을 하지 못하는 걸까""B가 또 약속을 취소했다. 하지만 괜찮다고 말했다. 정말 괜찮은 걸까? 나는 왜 항상 괜찮다고 말하는 걸까?"


날짜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더 많은 자기부정이 눈에 띄었다. 내가 느낀 불편함, 무시된 경계, 억눌린 감정들. 그 모든 것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일기장 속의 나는 자신을 의심하는 동시에 어딘가에 소속되기 위해 자신을 지우고 있었다. 가장 슬펐던 것은 그 모든 순간에 나 자신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 문장들 사이로, 내가 얼마나 자신을 속이며 살았는지 보였다. 타인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나를 지우는 일상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일기장을 덮으며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면서 동시에 깨달음의 눈물이었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나 자신에게 부정직했는지. 내가 얼마나 많은 순간들은 나답지 않게 살았는지. 그 모든 순간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가슴을 짓눌렀다.


나는 그 친구에게서 끊임없이 무효화 메시지를 받았다. "그 정도로 상처받을 일이야?",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지 마",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아 하는데". 이런말들이 쌓일 때마다 나는 조금씩 움츠러들었다. 내 감정은 점점 작아지고, 다른 사람의 해석이 내 현실이 되어갔다. 마치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이 점점 왜곡되어 가는 것처럼, 그 말들은 천천히 내 현실 인식을 흔들었다. 나는 내 감정보다 타인의 판단을 더 신뢰했다. 타인의 시선을 통해 나 자신을 보기 시작했다.


상실과 공허함


친구와 손절 후 몇 주는 혼란스러웠다. 마치 안갯속을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친구가 곁에 없는 삶이 낯설었다. 습관처럼 전화를 걸려다 멈추고, 좋은 일이 생기면 메시지를 보내려다 그만두곤 했다. 10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한 추억들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우리가 자주 갔던 곳, 함께 웃으며 봤던 영화, 서로에게 선물했던 작은 물건들. 그 모든 것들이 이제는 쓸쓸함을 남겼다. 때로는 문득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고개를 돌리기도 했다.


가끔은 그녀가 남긴 흔적들이 생각보다 크다는 사실에 놀라곤 했다. 우리의 추억이 묻어있는 장소들을 지날 때마다 가슴 한편이 쓰려왔다. 내 취향의 상당 부분이 그녀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도 새롭게 깨달았다. 듣는 음악, 읽는 책, 심지어 자주 가는 카페까지. 그녀의 부재는 단순히 한 사람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 일상의 일부가 통째로 빠져나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리고 의심. 끊임 없는 의심. 내가 너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건 아닐까? 관계를 더 노력해서 지켜볼 수는 없었을까? 나는 정말 그녀의 말처럼 문제가 많은 사람일까?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판단하는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떠나간 관계의 빈자리는 예상보다 컸고, 그 공허함을 채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때로는 그 공허함이 압도적으로 다가와 숨쉬기조차 버거웠다.


회복의 시작


회복은 천천히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발견들로. 혼자 있을 때 느끼는 편안함. 아무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 공간에서의 자유로움. 나의 일정과 선택을 온전히 나의 필요와 원함에 맞춰 계획할 수 있는 여유. 누구의 판단도 받지 않고 내 생각을 펼칠 수 있는 자유.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 더 이상 '이것을 좋아해도 되는지' 묻지 않게 되었다. 천천히 나 자신의 취향과 생각을 재발견해 깠다. 내가 좋아하는 색, 내가 즐기는 활동, 내가 추구하는 가치들. 그것들을 다시 찾아가는 여정은 마치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보물을 발굴하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떠났다. 아침에 일어나 그날의 일정을 완전히 내 마음대로 정했다. 갑자기 계획을 바꿔도, 누구에게도 설명하거나 사과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내가 쉬고 싶을 때 쉬었다. 그 자유로움이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점점 더 익숙해졌다. 나는 내 삶의 주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지지해 주는 다른 관계들. 그들은 내가 틀리더라도 비난하지 않았다. 내 감정을 과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가 느끼는 감정을 인정해 주었다. 그들 앞에서 나는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로 존재해도 받아들여졌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이상했던 게 아니라, 그 관계가 건강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를 축소시키고 부정하는 관계가 아니라, 나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관계가 진정한 관계였다. 진짜 친구는 나의 가장 진실된 모습을 보고도 여전히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었다.


나를 되찾는 여정


어느 날 아침, 창문을 열자 서늘한 가을 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탁상 달력은 그날이 손절 후 정확히 1년이 되는 날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1년. 그 시간은 생각보다 길고도 짧았다. 커피를 내리며 지난 1년을 되돌아보았다. 처음의 혼란과 상실감, 그리고 조금씩 자리를 찾아가는 나 자신. 예전의 나라면 이 날을 우울하게 보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달랐다.


1년 전 내가 선택한 '손절'은 단순히 누군가와의 관계를 끊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 자신과 맺은 새로운 약속이었다. 내 감정과 경계를 존중하겠다는, 나를 지켜내겠다는 선언이었다. 상실의 공간은 시간이 흐르며 천천히 자유의 공간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그 자유 속에서 나는 다시 나를 발견하고 있었다.


나는 일기를 쓴다. 그러나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더 이상 자책과 의심으로 가득 찬 문장들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는 문장들. "오늘 나는 이런 감정을 느꼈다", "이 상황에서 나는 이렇게 대응했다", "이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다". 단순하지만 힘 있는 문장들. 그 문장들은 내가 나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게 도와주었다.


가끔 과거의 관계를 떠올릴 때면, 여전히 가슴 한켠이 아릿하다. 그러나 그 아픔은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내가 겪은 경험의 일부일 뿐. 그 경험을 통해 나는 더 단단해졌고, 내 감정과 경계를 더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다. 때로는 관계의 끝이 새로운 시작의 문을 열어주기도 한다.


지난 주말, 새로운 사람들과의 모임에 참석했다. 이전에는 낯선 환경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하곤 했다. 내가 할 말, 내 행동이 적절한지 수없이 검열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나는 그저 내가 되고 싶은 나로 존재했다. 내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동의하지 않는 의견에는 정중하게 '아니오'라고 말했다. 누군가 내 의견을 잘못 해석했을 때는, "그건 내가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에요"라고 분명히 했다.


놀랍게도, 그 자리에서 몇몇 사람들은 내 솔직함에 호감을 표했다. 가면 없이 진실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오히려 더 많은 진정한 연결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내 솔직함을 반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 역시 괜찮았다. 더 이상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작


이제 나는 내 감정을 무시하거나 축소하지 않는다. 불편한 감정도, 부정적인 감정도 모두 나의 일부로 인정한다. 그것들은 내게 무언가를 알려주는 신호다. 내 경계가 침범되었을 때, 내 가치가 존중받지 못했을 때, 내 몸은 먼저 알고 반응한다. 그 신호를 무시하는 대신, 나는 이제 그것에 귀 기울인다.


관계에서도 변화가 생겼다. 더 이상 건강하지 않은 패턴을 반복하지 않는다. 내 감정이 무시되거나, 경계가 존중받지 못하는 관계는 과감히 재평가한다. 모든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경계를 세우고 그것이 지켜지도록 노력한다. 때로는 거리를 두기도 하고, 때로는 솔직하게 대화를 시도한다.


며칠 전, 오랜만에 연락이 온 지인이 있었다. 과거 나를 무시했던 사람이었다. 그녀의 메시지를 보며 잠시 옛 기억이 떠올랐지만, 더 이상 과거의 패턴에 끌려들지 않기로 했다. 정중하게 응답하되, 내 경계를 명확히 했다. 놀랍게도 그녀는 이전과 다른 태도를 보였다. 사람은 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변화를 기대하며 나를 계속 희생시키는 것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이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때로는 여전히 옛 습관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자기 의심의 목소리가 불쑥 고개를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내게 상기시킨다. 이것은 과정이라고. 완벽할 필요는 없다고. 중요한 것은 방향이라고. 그리고 그 방향은 분명하다. 나를 향해, 내 안의 진실된 목소리를 향해.


창밖으로 낙엽이 하나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순환의 일부다. 어떤 것들은 떨어져야 새로운 것들이 자라날 공간이 생긴다. 관계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때로는 놓아야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조금 더 나 자신에게 가까워진다.


오늘 나는 새로운 카페에 갔다. 혼자서. 이전의 나는 늘 누군가와 함께여야 안정감을 느꼈지만, 이제는 나 자신과 함께하는 시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창가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각자의 이야기를 품고 살아간다. 그리고 나 역시 내 이야기를 써나가고 있다. 더 이상 누군가의 시선에 맞춰진 이야기가 아닌, 온전히 나다운 이야기를.


회복은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임을 배웠다. 그리고 이 여정에서 나는 매일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손절은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나를 찾아가는,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여정의 시작이었다.



keyword
이전 02화01. 의심과 혼란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