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04.나를 잃지 않기 위한 회복방법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by 김지윤

무너졌던 자리에서


지난 봄날에 왜 불편함을 느꼈는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내가 느낀 불편함은 단순한 예민함이 아니었다. 뱃속이 살짝 꼬이는 느낌, 가슴을 누군가 압박하고 있는듯한 감각, 목 뒤로 천천히 올라오는 작은 열감...그때는 '내가 너무 에민한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그건 내 몸이 먼저 알아차린 경고 신호였다.


가스라이팅을 경험할 때 가장 먼저 손상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직감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본내 위험을 감지하는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지만, 그 신호를 반복해서 무시하도록 '훈련'되면 점점 내면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다.


아니야, 네가 오해한 거야.
너 정말 예민하구나.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어. 네가 너무 생각이 많은 것 같아.


이런 말들이 귓가에 맴돌 때마다, 나는 조금씩 내 직감보다 타인의 해석을 더 믿기 시작했다. 마치 희미해지는 별빛처럼, 내 감각은 점점 흐릿해졌고, 자신의 경험을 의심하는 습관이 조용히 자리 잡았다. 내가 직접 느끼고 경험한 현실보다, 타인이 들려주는 '진실'이 더 진짜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많아졌다.


지난화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관계 속에서 경계선이 흐려질 때 우리는 천천히 자신의 직감을 배제하게 된다. 그 과정은 마치 서서히 데워지는 물 속의 개구리처럼, 너무 천천히 진행되어 스스로 위험한 상황에 처햇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래도 희망은 잇다. 직감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조용히 숨어 있을 뿐이다. 회복의 여정에서 가장 먼저 다시 찾아야 할 보물이 바로 이 직감의 소리이다.


직감을 따랐던 순간과 무시했던 순간


우리 모두에게 직감을 따랐던 순간과 그렇지 않았던 순간이 있을 것이다. 두 경험을 비교해보면 직감이 얼마나 소중한지 더 분명히 느낄 수 있다. 2가지의 내 경험의 사례로 이야기 해보자.


친구의 소개로 만난 한 선배와의 첫 만남이 생각난다. 겉으로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매력적인 외모, 많은 이들의 호감... 그러나 대화할 때마다 내 등 뒤로 차가운 기운이 스치는 듯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칭찬했고, 객관적으로 보면 그의 행동에는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내 직감은 작은 경고음을 울려댔다.


어느 날 그가 갑자기 개인적인 도움을 요청했는데, 나는 그때 불편한 직감을 따라 정중히 거절했다. 그 순간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하는 것을 보았다. 이후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선배의 호의를 거절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분명 본인의 개인적인 도움을 내게 청했는데도 말이다. 나는 그때 내 직감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잠시 불편한 상황을 겪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더 큰 어려움을 피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사례로는, 직장에서 만난 한 동료와의 관계에서 경험이다. 직장에서 만난 그녀는 처음부터 말과 행동 사이에 미묘하게 불일치하는 부분들이 있었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태도, 은근한 비난의 패턴이 보였지만, '직장에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내가 느낀 직감을 무시하고 있었다. 결국 6개월간 지속된 그 관계는 내 자존감과 업무 능력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매일 아침, 그녀를 마주칠 생각만 해도 가슴이 조여왔고, 소화가 되지 않고, 이유 모를 두통이 찾아왓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내가 예민해서 그런거야.'라고 스스로를 탓했다.


직감을 따른 경우와 무시한 경우, 그 결과는 확연히 달랐다. 전자는 잠싱의 불편함과 그 후의 평화가 생겼고, 후자는 오랜 시간 지속된 고통과 자기 의심의 늪이 다가왔다. 이런 경험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가끔은 그 직감을 따라 행동했을거고, 가끔은 무시했을거다. 직감을 무시했을 때를 돌아보면, 마치 내 영혼이 미리 보낸 편지를 읽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린 것 같은 후회가 밀려온다. 직감은 우리의 무의식이 보내는 강력한 메세지다. 그것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미세한 신호들을 종합해 보내는 경고이자 안내다.


직감을 따랐을 때의 가장 큰 선물은 평화다. 갈등이 있을지라도, 내 안에서 느껴지는 평화로움은 그 결정이 옳았음을 증명한다. 반면 직감을 억누르고 이성과 논리만을 따랐을 때, 비록 겉으로는 '합리적인' 선택처럼 보일지라도 내면의 불화는 계속된다. 나는 이제 직감을 무시하지 않는 연습을 시작했다. 작은 결정에서부터 시작했다. 어느 카페에 갈지, 어떤 책을 읽을지부터.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점점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익숙해졌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나를 배신한 적은 없다.


몸이 보내는 작은 속삼임들


건강하지 못한 관계 속에서 우리 몸은 끊임없이 작은 신호를 보낸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단순한 '스트레스'나 '피로'로 치부하며 지나치곤 한다. 몸이 보내는 소중한 경고 신호들을 함께 살펴보자.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는 순간 - 특정 사람을 만나기 전이나 대화 중에 느껴지는 두근거림

숨이 막히는 듯한 감각 - 가슴 위에 보이지 않는 무게가 올려진 것 같은 느낌

위장의 불편함 - 긴장될 때 찾아오는 메스꺼움이나 소화불량

관자놀이의 압박감 - 특별한 이유 없이 찾아오는 두통

목과 어깨의 긴장 -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츠리게 만드는 반응

설명할 수 없는 피로감 - 충분히 쉬었는데도 느껴지는 에너지 고갈

잠들기 어려운 밤 - 이유 모를 불면증이나 자주 깨는 수면 패턴

식욕의 변화 - 스트레스로 인한 과식 또는 식욕 상실


특히 주목할 점은, 특정 사람을 만나기 전후로 이런 증상들이 반복된다면 그것은 우연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우리 몸은 종종 의식보다 먼저 위험을 감지한다. 내 경험을 돌이켜보면, 특정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목 뒤가 뻣뻣해지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처음에는 '사회적 불안감'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깨달은 건 그 모임에 항상 참석하는 한 사람과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 몸의 지혜는 우리가 머리로 부인하거나 합리화하려는 것보다 훨씬 더 정직하다. 회복의 첫걸음은 이 작은 신체적 신호들에 귀 기울이는 것에서 시작된다.


가스라이팅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특히 두드러지는 신호는 '목소리의 변화'다. 특정 사람 앞에서 목소리가 작아지거나, 말의 속도가 빨라지거나, 갑자기 더듬거리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무의식적인 방어 기제로, 몸이 긴장 상태에 들어갔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신호다. 또 다른 중요한 신호는 '시간 왜곡'이다. 특정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시간이 비정상적으로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이는 그 상황이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몸은 위험 상황에서 시간을 확장시켜 인식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신호들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신체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다. 나의 몸이 어떤 방식으로 불편함을 표현하는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신체적 반응이 나타나는지 꾸준히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작업은 자신과의 연결을 회복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직감 회복을 위한 연습


직감은 마치 근육과 같다. 시간이 지나면 약해지지만, 꾸준한 관심과 훈련으로 다시 강화될 수 있다. 일상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직감 회복 연습법을 소개한다.


몸의 지도 그리기 (5분) :편안한 자세로 앉거나 누워서 시작해보자. 발끝에서부터 머리까지, 천천히 주의를 옮기며 각 부위의 감각을 느껴보자. 어디가 특별히 긴장되거나 불편한지 살펴보자. 판단하지 말고, 그저 관찰자의 눈으로 바라보자.

감정의 색깔 일기: 하루 중 마음이 움직였던 순간들을 기록해보자.그 감정이 몸의 어느 부분에서 어떤 색깔, 온도, 질감으로 느껴졌는지 표현해보자. 그 감정이 나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직감의 작은 실험: 일상의 작은 결정에서부터 직감을 따르는 연습을 시작해보자. 예를 들면 "오늘은 어떤 음식이 당길까?", "어떤 길로 걸어갈까?"결과를 기록하고, 천천히 되돌아보자.

몸의 닻 내리기: 긴장되는 상황에서 몸의 한 부분(손바닥, 발바닥, 배)에 주의를 집중해보자. 그 부위의 감각(따뜻함, 맥박, 무게감)을 자세히 느껴보자. 이렇게 하면 머릿속 생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현재의 몸 감각으로 돌아올 수 있다.

숨결의 춤 따라가기 하루에 몇 번, 잠시 호흡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보자.들숨과 날숨의 감각, 호흡의 깊이와 리듬을 느껴보자. 호흡이 나의 감정 상태와 어떻게 춤을 추고 있는지를 알아차려보자.


이런 작은 연습들을 통해 조금씩 자신의 몸과 다시 연결되는 감각을 회복할 수 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명확한 신호가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인내심을 갖고 계속하다 보면, 마치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좋아하는 노래를 다시 듣는 것처럼, 서서히 내면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오기 시작할 것이다.


직감 회복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판단하지 않는 태도'다. 몸과 마음의 신호가 느껴질 때,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분석하려 하지 말고, 그저 그 존재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자. "아, 이런 감각이 있구나"라고 단순히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큰 변화가 시작된다. 또한, 직감은 고요함 속에서 더 선명하게 들린다. 하루에 단 5분이라도 외부 자극(휴대폰, TV, 음악)을 모두 차단하고 그저 존재하는 연습을 해보자. 처음에는 불편할 수 있지만, 이 고요함이 직감의 목소리를 듣는 데 필수적인 공간을 만들어준다.


작은 성공 경험을 쌓아가는 것도 중요하다. 직감을 따라 내린 결정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을 때, 그 순간을 기념하고 축하하자. "내가 나를 믿었고, 그것이 옳았다"는 경험이 쌓일수록 직감을 신뢰하는 능력도 함께 성장한다.


직감과 불안, 그 미묘한 차이


직감과 불안은 때로 비슷한 몸의 반응을 일으켜서 구별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그 본질은 매우 다르다.직감은 주로 명료하고 고요하며, 특정 상황이나 사람에 대한 즉각적인 '앎'의 형태로 다가온다. 반면 불안은흐릿하고 혼란스러우며, 주로 과거의 상처나 미래에 대한 걱정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다음 체크리스트를 통해 직감과 불안을 구별해보자.


직감의 향기:

문득, 선명하게 떠오르는 느낌

특정 상황이나 사람에 대한 명확한 신호

주로 배나 가슴 중심부에서 느껴지는 감각

행동의 방향을 부드럽게 안내하는 내비게이션

시간이 지나도 그 메시지의 진실성이 변하지 않음


불안의 그림자:

서서히 강해지며 점점 커지는 느낌

뚜렷한 대상 없이 모든 것에 대한 걱정

주로 머리, 목, 어깨의 긴장으로 나타남

결정을 어렵게 만드는 혼란스러운 생각들

시간이 지나면 다른 걱정거리로 바뀌거나 강도가 변함


가스라이팅을 경험한 많은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구별하는 능력이 흐려져 있다. 모든 내적 경고 신호를 '과민 반응'이나 '불필요한 걱정'으로 해석하는 습관이 생기기 때문이다. 회복 여정에서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를 다시 구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자신의 내면에 판단 없이 귀 기울이는 작은 연습에서 비롯된다.

직감과 불안을 구별하는 또 다른 방법은 그 감각이 주는 에너지의 방향을 살펴보는 것이다. 직감은 보통 명확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이쪽으로 가라" 또는 "이것은 피하라"와 같은 단순하고 분명한 메시지다. 반면 불안은 대개 에너지를 소진시키며, 여러 방향으로 당기는 혼란스러운 상태를 만든다.


내 경험에서, 직감을 따랐을 때는 그 결정 이후에 일종의 '해방감'이 찾아왔다. 마치 오랫동안 안고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은 상쾌함. 반면 불안에서 비롯된 결정은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의심과 후회, 걱정을 동반했다.

직감과 불안을 구별하는 능력은 연습을 통해 향상된다. 그리고 이 연습은 우리의 삶에 더 큰 평화와 명료함을 가져다준다.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신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단순히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여정의 시작이다.


다음 화에서는 이러한 직감을 바탕으로, 반복되는 가스라이팅의 패턴을 인식하고 대응하는 방법에 대해 더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우리의 회복 여정은 계속된다.





매주 목,일 연재됩니다.


keyword
이전 04화03. 보이지 않던 경계선의 침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