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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내면의 비판자

내재화된 가스라이팅 극복하기

by 김지윤

거울 앞에 서서 내 얼굴을 바라보던 어느 날이었다. 문득 예전 연인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너는 항상 불안해 보여." 거울에 비친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니 정말 불안함이 서려있는 것만 같았다. 그의 말이 맞았던 걸까? 아니면 그가 내 안에 불안을 심어놓은 것일까? 가스라이팅의 가장 교묘한 점은 시간이 흐르면서 상대방의 말이 마치 내 생각인 것처럼 내면화된다는 것이다. 마치 거울에 비친 왜곡된 이미지를 진짜라고 믿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타인이 투영한 왜곡된 자아상을 서서히 받아들인다.


내 안에 자리 잡은 타인의 목소리


"너는 너무 예민해.", "너는 항상 그런 식으로 반응하더라.", "다른 사람들은 다 할 수 있는데, 너만 못하는 거야."

이런 말들을 반복해서 들으면, 어느 순간 우리는 스스로에게 같은 말을 하기 시작한다. "내가 너무 예민한가?", "나만 이렇게 느끼나?", "왜 나는 이런 간단한 일도 제대로 못하지?".


내 경험을 돌아보면, 예전 연인은 내 감정 표현을 종종 '과도하다'라고 비난했다. "넌 항상 오버해.", "너무 민감하게 구는 거 아니야?", "처음에는 그의 말에 반박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내 감정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어떤 일에 분노나 슬픔을 느낄 때마다, 내 첫 반응은 "이건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가?" 하는 의심이었다.


더 무서운 것은 이런 내면화된 비판이 원래의 관계를 넘어 삶의 다른 영역으로 확장된다는 점이다. 연인 관계에서 시작된 자기 의심이 직장 생활, 친구 관계, 심지어 혼자 있을 때의 자기 인식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마치 내 안에 작은 가스라이터가 자리 잡은 것처럼.


스스로를 공격하는 내면의 목소리들


직장에서 동료와 갈등을 겪은 후, 나는 직업적 판단에 대한 자신감을 완전히 잃었던 적이 있다. 그녀는 내 모든 제안에 의문을 제기했고, 종종 내 의견을 비효율적이라고 평가절하했다. 결국 나는 내 경험에 따른 의견을 내는 것조차 두려워하게 되었었다.


오랜 친구와의 단절 이후에도, 그녀의 비판적인 목소리는 내 안에 남아 있었다. 새로운 사람들은 만날 때면 "너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그의 말이 떠올라 대화 중에 불안해졌다. 새 옷을 고를 때면 "네 패션 감각은 별로야."라는 비난이 내 생각을 지배했다. 이런 내면화된 비판은 마치 보이지 않는 감옥과 같다. 새로운 도전을 피하게 만들고, 내 감정을 불신하게 하며, 건강한 경계를 세우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내면의 비판자와 대화하는 법


내면화된 비판의 목소리는 완전히 없애기 어렵다. 오히려 그 목소리와 건강한 관계를 맺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의사 선생님께 상담받을 때 했던 효과적인 방법들을 나누고자 한다.


첫째, 목소리 식별하기다. 자기비판적인 생각이 들 때마다 잠시 멈추고 "이것이 정말 내 목소리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말은 반복하고 있는 것인가?'라고 물어보자. 대부분의 경우 그 목소리의 출처를 찾을 수 있다.

둘째, 목소리에 이름 붙이기다. 내면의 비판자에게 이름을 붙이면 (예: 비판적인 철수) 그 목소리와 자신을 분리할 수 있다. 이것은 목소리에 휘둘리지 않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셋째, 직접 대화하기다. 내면의 비판자가 "너는 항상 이런 실수를 해"라고 한다면, "항상은 아니야. 때로는 실수할 수 있어, 모든 사람이 그래"라고 건강한 생각으로 응답해 보자.

넷째, 증거요구하기다. "내가 정말로 '항상' 그런가?"라고 내면의 비판자에게 물어보자. 대부분의 비판은 증거가 부족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실적 관점 취하 기다. 친한 친구가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어떤 말을 해줄지 생각해 보자. 대부분 우리는 타인에게는 훨씬 더 이해심 있고 현실적인 조언을 한다.

이런 대화 방식을 꾸준히 연습하면, 내면의 비판자의 목소리는 점점 약해지고 나 자신의 건강한 목소리가 강해질 것이다.


새로운 내면의 목소리 만들기


내면화된 비판의 목소리를 약화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자리를 건강한 자기 대화로 채우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시도했던 '몸의 신호 듣기' 연습은 이러한 새로운 자기 대화의 첫걸음이었다. 이제 한 단계 더 나아가, '내면의 지지자'를 발전시켜 보는 거다. 이는 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응원하는 존재가 될 거다.


매일 몇 분씩 내면의 지지자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연습을 해보는 거다. "오늘 정말 잘했어", "그 상황에서 최선이었다.", "실수해도 괜찮아, 그러니까 인간다운 거야.",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이 긍정적인 내면의 대화가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자신을 대하는 방식을 의식적으로 바꾸는 것도 중요하다. 실수를 했을 때, 친한 친구가 같은 실수를 했다면 어떻게 대해줄 것인지 생각해 보자. 그 친절함을 자신에게도 베풀 수 있어야 한다.


회복의 여정 : 자기 신뢰를 향해


내면화된 비판에서 벗어나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그것은 작은 습관의 축적을 통해 서서히 이뤄진다. 친구와의 손절 이후의 회복 과정처럼, 내면화된 비판에서 벗어나는 여정 역시 단계적으로 진행했다. 처음에는 하루에도 수십 번 내면의 비판자가 말을 걸어왔다. 점차 그 빈도는 줄어들었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이건 그냥 습관일 뿐이야'라고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변화의 모습니다. 내면화된 비판의 목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더라도, 그것을 '자신'이 아닌 '습관적 사고 패턴'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 그리고 그 목소리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되는 것.


회복의 여정에서 내게 가장 도움이 된 문장 있다. "이 생각은 진정한 나의 믿음인지 점검해 보자." 이 간단한 문장은 내게 잠시 멈추고, 자동적인 자기비판에서 벗어나, 보다 의식적이고 자비로운 관점을 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내면의 비판자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과정은 자기 신뢰 회복의 핵심이다. 타인의 왜곡된 거울이 아닌, 자신만의 진실된 관점을 통해 세상과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가스라이팅의 긴 그림자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찾게 된다.




매주 목, 일 연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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