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균열
우리는 서로를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사이라고 소개하는 사이였다. 늦은 밤에도 부르면 나와 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 퇴근길에 같은 노을을 바라보면 같은 문장을 떠올릴 수 있다는 믿음. 십 년이라는 시간은 종종 우리의 사이를 증명하는 단어로 여길 만큼. 우리는 그 단어를 품고 더 멀리 함께 걷고 있었다. 친구가 다니고 있던 회사에 들어가려 서류를 함께 쓸 때, 나는 든든함이 느껴져 설레었다. 출근을 해서 메신저를 켜면 먼저 떠오를 이름이 있었고, 점심 메뉴를 고를 때 묻지 않아도 되는 취향을 아는 사람이 있었으며, 악소문이 돌아도 '그거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안도감. 든든함과 안도는 사람을 취하게 만들었다. 취기가 오르면, 균열의 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어야 했다.
친구는 팀장이 되고, 이름 뒤에 호칭이 하나 더 붙는다는 것만으로도 생각보다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팀장님'이라는 호칭이 어깨에 올랐을 때, 친구는 눈빛이 위로 향해 있었다. 시선의 높낮이는 대화의 톤을 바꾸고, 대화의 톤은 사람의 자리를 바꿔놨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나가던 어느 날 빠르게 업무가 진행되고 있었다.
고객들의 전화가 폭주하기 시작했고, 업무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가고 있었다. 그러다 정적을 만든 한마디. "지윤 씨! 아까 이거 왜 이렇게 한 거예요?." 앞뒤 다 자르고 날아온 한마디에 나는 "네? 제가 어떤 걸 실수했을까요? 아까 진행하라고 하셨던 부분은 이렇게 해놨는데요." (자세한 문장의 내용은 개인정보가 담겨있어. 문장을 수정했다.) 그때 나에게 날아온 문장은 날카로웠다. "아니. 어쨌든, 내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았다는 거잖아요."...'어쨌든'. 그 단어는 실수가 아닌 책임의 주소가 나에게 쥐어진 거 같았다.
작은 금은 크게 소리가 나지 않는다. 팀원들이 있는 자리에서 내 이름이 크게 불렸을 때도 그랬다. "지윤 씨!!!!! 키보드 소리 좀 작게 내세요." , "지윤 씨!! 아까 이거 했어요?", 하루에도 수십 번 내 이름이 너의 입에서 크게 들려왔다. "이런 건 기본인데, 아직도 이게 안되나?", 들으라는 식의 혼잣말. 그 문장은 나에게 화살이 되어 날아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그때 날아온 메시지 하나. '너 지금 한숨 쉬었어?'... 사람의 들숨이 길어지면 어깨가 먼저 들린다. 어깨가 들리면 표정이 굳는다. 나의 굳은 표정은 나 자신을 더 어색하게 만들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퇴근 후 걸려온 전화 한 통 "오늘 내가 좀 세게 말했지?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인 거 알지? 남들이 우리 친구라고 너 편의 봐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 나를 위한다는 소리. 포장지에 적힌 문구와 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포장지 안의 내용물은 달랐다. '권위', '면박'. 나는 양손으로 포장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다 말았다. 여기서 이걸 풀어버리면, 우리의 십 년이라는 시간이 날아갈 거라는 걸 알아서였다. 풀지 않으면, 버릴 수 없는것이 포장지니까. 그렇게 우리의 십년이라는 시간을 지킬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날 이후부터 회사를 나오는 유리문을 나설 때마다 자동문 상단의 센서가 작은 숨을 내쉬었다. 퇴근길에 창문에 머리를 기대면 하늘의 노을과 가로등 불빛들이흐릿하게 길어졌다. 그 선 사이사이에 네가 던진 문장들이 끼어있었다. '어쨌든', '아직도', '너 잘되라고'.
단단한 표면을 손끝으로 자꾸 쓸다 보면, 어는 순간 얇은 스크래치가 생긴다. 나는 그 스크래치를 따라가듯, 메모 앱을 열었다. 떠오르는 장면들을 적어 내려갔다. 시간, 장소, 말의 조각. 내 심장의 속도. 위장의 미세한 뒤틀림. 손끝이 아려오는 차가움 까지. 몸은 늘 진실을 먼저 말하는 법이니까.
머리는 빠르게 합리화를 찾아 헤매지만 몸과 머리 사이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진실과 가까워지는 법이다. 그날 밤늦은 시간까지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이 오지 않아 산책을 나갔다.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편의점에서 투명한 우산을 골랐다. 값싼 우산은 종종 뒤집혀 버리지만, 그날은 이상하게 단단했다. 우산의 중심을 잡고, 나는 생각했다. “여기까지 할래.”, "내 감정은 소중해.”, 현관 앞에서 신발 끈을 풀며 생각이 더 또렷해졌다. 그날의 산책은 나를 지키는 가장 작은 시작이었다.
다음 날, 사무실 공기는 유난히 건조했다. 코피가 나올 듯한 건조함. 건조한 공기는 작은 마찰을 크게 만든다. 그 순간 "지윤 씨!" 하며, 큰소리가 나왔다. 사무실의 공기가 멈칫했다. 멈칫은 언제나 불편을 낳는다. 불편은 권위를 불러온다. 너는 가볍게 웃으며 분위기를 풀었다. "내가 목소리가 너무 컸다." 너는 웃음을 지우개처럼 썼다. 그러나 방금 있었던 불편함을 지워버리진 못한다는 걸 너도 알았을 거다. 그렇게 매번 웃음으로 넘겨 버리는 너의 태도에 점점 나는 웃음을 잃어갔다.
비가 흩어지는 오후, 우리는 다시 마주 앉았다. 너의 말은 “팀이 돌아가려면, 어느 정도 희생이 필요해.” 희생이라는 단어는 오래 묵혀놓으면 미덕처럼 보인다. 하지만 누군가의 희생은 때때로 타인의 권력에 힘을 실어준다. 나는 컵 가장자리를 손톱으로 느리게 훑으며 대답했다. “희생의 설계자가 늘 같은 사람일 때, 그건 공정하지 않아.” 너는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피곤함은 권력의 다른 이름이었다. “너 변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변했어.” 변한 것은 성격이 아니라 구조였다. 내 말의 무게중심과 감정의 주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갈등은 어느 날 갑자기 파국으로 번졌다. “너는 내가 팀장으로 보이긴 해?” 날카로운 모양의 질문을 내게 던졌다. 물음표의 흔한 역할은 답을 듣는 것이지만, 너의물음표는 답을 강요했다. ‘보인다’고 말하길. 그 말의 내부에는 ‘그렇다면 내 말을 들어라’가 겹겹이 포개져 있었다. 공과 사를 구분하자던 너의 말은, 이상하게도 나에게만 더 엄격했다. 점심시간엔 “그때 그 영화 장면 기억나지?” 하며 웃다가도 오후에는 “이 정도도 못 하면 곤란하지”로 혼돈을 줬다. 내 자리엔 선이 그어졌 버렸다. 그러나 그 선의 주인은 내가 아니었다.
갈등은 점점 파국으로 번졌다. 옥신각신 서로에게 생체기를 입히는 카톡이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 친구에게서 “내가 팀장인 게 그렇게 불편해?” 마지막 문장은 날카롭고 차가웠다. “너는 내가 팀장으로 보이긴 해?” 나는 그제야 이해했다. 네가 묻고 있던 건 ‘나’에게 너의 ‘권위’를 인정하라는 거였다. 권위를 인정하라는 요구는 나에게 감정의 쓰레기를 함께 떠안으라는 통지서가 붙어왔다. 그 통지서의 하단에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반환 불가’.
그즈음 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를 처음 제대로 읽었을 때, 방의 오래된 전등이 깜빡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켜졌다 꺼졌다. '설마 내 이야기일까'하고 고개를 들면, 바로 뒤에서 '그래도 친구인데'하고 끼어들었다. 내 머릿속은 타인의 논리를 숙달해 왔다. 숙달은 안정적인 것 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굴레다.
책의 사례를 따라 내 장면들을 다시 재생했다.
공개석상에서의 핍박
사과 없는 '어쨌든'
농담으로 포장된 폄하
권위를 확인하는 질문
장면에 이름이 달라붙기 시작했다. 이름을 알면 윤곽이 생긴다. 윤곽을 보면 길이 보인다. 그날 발, 나는 내 이름으로 된 서랍을 열었다. 오래 미뤄둔 선택지가 있었다. 퇴사 그리고 손절. 누군가에게 등을 돌리는 일은 가장 마지막에 꺼내는 카드였지만, 영원하고자 미뤄 둔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느끼고 있었던거다.
나는 핸드폰 사진첩의 선택 버튼을 길게 눌렀다. 화면에 '삭제'라는 단어가 떴다. 십 년의 사진들이, 여름 바다의 소금 냄새가, 겨울 골목의 붕어빵까지 담겨있는 사진들. 그 속의 기억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삭제 버튼을 눌렀다. 화면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렇게 조용히 결심했다. 너와의 인연을 종결하기로.
퇴사 서류에 서명하던 날, 오전의 햇빛은 유난히 납작했다. 납작한 빛은 사물의 그림자를 낮게 눌렀다. 낮게 눌린 그림자 위로, 내 이름이 한 번 더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다. 그동안 고마웠다고, 그리고 지금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만나게 된 거에는 너의 영향도 있다고, 하지만 더 이상 너와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라고 남겼다. 감정의 해명은 붙이지 않았다. 나는 전송 버튼을 누르고, 방해금지 모드를 켰다. 핸드폰에 방해금지 작은 아이콘이 떴다. 아이콘이 뜨는 순간, 내 가슴의 떨림도 작아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창 밖의 신호등이 잔상으로 늘어졌다. 나는 머릿속으로 모든걸 정리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이제는 그 누구의 말과 감정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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