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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rpe diem Oct 16. 2020

EP24. 미숙해서 찬란한 생이여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브런치를 시작하고 글들이 꾸준히 쌓이기 시작했다. 대부분 내 경험에 기반한 이야기들이지만 40년을 살아왔고 앞으로 살아갈 시간 동안 겪을 이벤트들은 무궁무진할 테니 새로운 글을 써내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자꾸 쏟아내기만 해서일까 어쩐지 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평소 서점 가는 걸 좋아하고, 인터넷 서점을 자주 드나들며 책을 사 모았고 서재에 책은 쌓여갔지만 그 책을 내 것으로 만드는 노력을 하지 않은 지 오래라는 걸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나는 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고, 매일 수업 준비를 하면서 새로운 글을 접하니 그걸로라도 연명하자 버티기 바빴다. 그러나 이제 진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외면해서는 안 될 일이란 걸 깨닫고 글쓰기 소모임에서 제안한 독서 모임에 참석하기로 하고, 제일 먼저 집어 든 책이 ‘데미안’이었다.



한참을 정리해도 또 한참이다.


언제나 물어야 해, 언제나 의심해야 하고. 그러나 일은 아주 간단해. 예를 들면 그런 나방이 자신의 뜻을 별이나 뭐 비슷한 곳까지 향하게 하려 했다면, 그건 이룰 수 없는 일이겠지. 다만 나방은 그런 따위 시도는 안 해. 나방은 자기에게 뜻과 가치가 있는 것,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 자기가 꼭 가져야만 하는 것, 그것만 찾는 거야.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일도 이루어지는 거지. / 76쪽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고 궁금한 게 많아서 늘 여기저기 두리번거리기에 바빴다. 주변을 살피는 게 습관이니 해야 할 일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남들보다 습득이 빨라 업무 처리도 빠른 데다 말도 곧 잘해서 신뢰감을 주는 사람이란 말을 자주 들었다. 그런 내가 느끼는 최대 단점은, 주위의 신뢰에 실망감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아서 혹은 나의 무지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잘 모르는 일에 대해 묻고 의심하는 대신 침묵하는 쪽을 택한다는 것이었다. 의심하고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을 본인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왜 그러지 못할까 회의적이었으나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다. 내가 필요로 하고 가져야 하는 것에 대한 구도를 게을리하지 않아야 믿을 수 없는 일도 이룰 수 있다는 데미안의 말은 고질병처럼 굳어버린 나의 폐부를 다시 한번 훅 건드렸다. 어쩌면 내가 진짜 바라는 게 뭔 지조차 제대로 모른 채 ‘타인의 눈’에 비친 내가 깨지지 않길 바라는 급급함이 전부라 수없이 넘어진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들 누구나 자기 스스로 찾아내야 해,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금지되어 있는지 - 자기에게 금지되어 있는지. 금지된 것은 결코 할 수 없어. 금지된 것을 하면 대단한 악당이 될 수 있지. 거꾸로, 악당이라야 금지된 일을 할 수 있기도 하고 말이야. 사실 그것은 그냥 편안함의 문제거든! 지나치게 편안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자신의 판결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금지된 것 속으로 그냥 순응해 들어가지. 늘 그러게 마련이듯이 그런 사람은 살기가 쉬워. 다른 사람들은 운명을 자기 속에서 스스로 느끼지. 그들에게는 어느 명예 있는 남자건 날마다 하는 일들이 금지되어 있어.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폄하되는 다른 일들은 허용되어 있어. 그러니 누구나 자기 자신 편에 서야 해. / 86쪽


 스스로 금기시하던 것을 처음으로 깨뜨려 괴로웠던 사건은 스무 살을 마무리하고 스물하나의 시작과 함께 찾아온 남자 친구와의 첫 경험이었다. 캄캄하고 두렵고 혼란스러운 나와는 달리 밖을 나서자마자 밀려온 허기를 달래려 지하철역 델리만쥬를 아무렇게나 욱여넣는 연인을 경멸하며 이별을 다짐했었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고 나의 처음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스물한 살의 나에게 아무도 강요한 적 없는 순결을 스스로 강제했던 시발점은 어디였을까. 여자는 몸가짐이 바라야 한다는 부모님의 엄격한 교육에 의한 세뇌 혹은 자유연애를 실천하며 교복을 줄여 입고 머리에 한껏 힘주고 다니는 친구들을 속된 말로 날라리 혹은 걸레라 부르며 혐오하던 학창 시절 그 어디쯤인 듯하다. 결국, 그 금기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닌 타인의 평가와 시선에 의한 것이었다. 오랜 고심 끝에,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범주 내에서 영위해야 하는 사랑의 표현이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뭐든지 허용과 금지의 영역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정해져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충동적으로 관계를 정리하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면 정답을 찾지 못한 채 죄책감과 후회로 오래도록 괴로웠을 것이다. 부모님의 엄격함 때문이든, 학창 시절 혐오의 동조 때문이든 타인에 의한 금지는 정답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은 왜 불안한 걸까?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한 거야. 그들은 한 번도 자신을 안 적이 없기 때문에 불안한 거야. (중략) 사람들은 정확히 알아. 사람 하나 죽이는 데 화약이 몇 그램이 필요한지. 그러나 어떻게 신에게 기도해야 하는지는 모르지. 어떻게 한 시간을 유쾌하게 보낼 수 있는지조차 모르는 걸. 저런 대학생들 술집을 한 번 봐! 아니면 부자들이 가는 유흥장들을 봐! 절망적이지! 이봐 싱클레어, 그 모든 것에서는 진정한 명랑함이 나올 수 없단다. 저렇게 겁을 먹고 서로 뭉친 사람들은 두려움과 악의로 가득 찼어. 아무도 남들을 신뢰하지 않아. / 182쪽


 사람은 누구나 불안을 안고 산다. 그래서 불안의 원인과 생김새는 다양하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불안함을 느끼는 건,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고 다양한 가능성이 무한대로 뻗어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생각해 보면 무한하고 불안정한 미래는 결국, 내가 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해야 그 형체를 드러내기 때문에 자신을 신뢰하고 나아가야만 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스스로를 믿지 못하면 결국 그 기회를 놓치고 만다. 자신을 대면하는 일은 사실 괴로운 법이다. 그러나 순간의 회피는 두려움과 불신을 가져올 뿐이다. 데미안은 인생의 해답은 결국 본인을 믿는 데서 시작됨을 분명하게 말해준다. 세 번째 읽는 데미안인데 이 구절을 십 대 혹은 이십 대에 쉽게 간과해 버렸다. 이상적 문장에 갇힌 허무맹랑한 철학이라 치부해 버렸던 건 아닐까. 이 당연한 이치를 마음 다해 받아들인 게 더 늦어지지 않아 다행이다.  



 붕대를 감을 때는 아팠다. 그때부터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아팠다. 그러나 이따금 열쇠를 찾아내어 완전히 내 자신 속으로 내려가면, 거기 어두운 거울 속에서 운명의 영상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내려가면, 거기서 나는 그 검은 거울 위로 몸을 숙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그와 완전히 닮아 있었다. 그와, 내 친구이자 나의 인도장인 ‘그’와. / 222쪽


 불혹의 나이지만 나는 늘 스스로를 완전히 성숙한 어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도 성장하는 중이며, 시행착오를 겪고 여전히 실수를 반복한다.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불혹이라지만 조금 담대하고 나를 믿게 되었을 뿐 여전히 자주 흔들리고 쉽게 무너진다. 그러나 지나온 세월이 축적되어 조금 더 견고해진 내가 있고 그게 초석이 되어 조금 덜 흔들리고 살짝 무너지다 균형을 되찾는다. 앞으로의 시간들이 불분명한 건 변함이 없지만 나름 스스로 꾸려갈 수 있는 힘이 생겼다고는 자부할 수 있다. 싱클레어의 아픔도 결국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거창하지 않지만 스스로 축적한 힘이 결국 삶을 이끌어 가는 전부임을 믿는다.





 누구에게나 제각각의 ‘데미안’은 존재한다.


데미안의 조력 그리고 싱클레어의 시련과 성장은 사실 별개의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나도 마찬가지다. 미숙해서 찬란한 나의 생은 앞으로  반짝일 것이다.  이상 쓰이지 않은 싱클레어의 삶도 그럴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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