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에 잡아먹히지 않도록
아이들에게 국어 문법 수업을 하다 보면 수많은 난관에 부딪힌다. 그중 하나가 ‘품사’와 ‘문장 성분’의 차이다. 품사는 ‘-사’로 끝나고 문장 성분은 ‘-어’로 끝난다는 원초적 설명을 시작으로 품사는 단어의 단위, 문장 성분은 어절의 단위라는 원론적인 설명을 덧붙여도 아이들은 어렵게만 느낀다. 그래서 결국 내 나름의 비유를 끌어와 아이들을 납득시키고야 만다.
“자, 이렇게 생각해 보자. ‘김지영’이라는 내 이름을 예로 들면, 이 이름이 변할까? 변하지 않지. 물론 개명을 하면 달라질 순 있지만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에야 이름은 달라지지 않아. 이게 바로 ‘품사’야. 그런데, 내가 집에 가면 우리 부모님의 딸이 되고, 이렇게 학교에 오면 너희들의 국어 선생님이 되지. 즉,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 내 역할은 언제든 변할 수 있어. 이게 바로 ‘문장 성분’이야. 이제 좀 이해가 되니?”
그제야 아이들은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 깨달음에 쐐기를 박기 위해 문장을 만들어 몇 가지 예시를 들면서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듣고 난 후에야 이번 비유도 결국 통했다는 확신이 선다.
집에서 나는 엄마, 아빠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자란 맏딸이다.
엄마, 아빠도 부모 역할은 처음이라 낯설고 어려워 행여 내가 잘못될까 애지중지 길렀고 그 기대와 관심이 얼마나 큰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난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하는 딸로 자랐다. 초등학교 저학년, 실수를 많이 한 수학(그 당시 산수) 시험에서 70점을 받고 실망할 엄마의 모습을 견딜 수 없어 필통에서 선생님이 채점한 것과 같은 돌돌이 빨간 색연필을 꺼내 7을 9로 고쳐 엄마에게 보여준 내 첫 거짓말은 어설프고 부자연스러웠다. 틀린 문항에 그어진 사선까지 고칠 생각은 못한 채 점수 고치기에만 급급해 실패로 끝난 후 엄마도 나도 좌절했다. 못 본 시험 점수보다 맹랑한 거짓말로 엄마를 속이려 했으니 엄마에겐 적잖은 충격이었을 것이고, 착한 딸이어야 했던 내가 엄마를 안심시키려다 더 큰 실망과 불안만 안겨주었으니 내 입장에서도 절망스러운 결말임이 분명했다. 어린 나이, 이 정도 생생한 기억이라면 내 거짓말은 작은 해프닝으로 일단락 되었어야 마땅하나 아이러니하게도 거짓말의 빈도는 되려 잦아졌다. 머리가 커지면서 몇 번의 크고 작은 거짓말로 엄마와 마찰을 겪으며 엄마는 나를 더 의심했고 의심부터 하는 엄마에게 난 이미 착한 딸이 아니었으므로 내 거짓말은 더 쉬워졌다. 거짓말을 했던 순간들을 돌이켜 보면, 엄마의 기준에서의 착한 딸과 내 자아가 원하는 모습은 늘 상충했다. 그러나 엄마의 말을 대놓고 전면 거역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내 행동을 관철했던 걸 보면, 엄마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릴 수 없는 일말의 미안함이 발동했던 건 아닌가 싶다.
나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다.
내 업무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 외에도 다양하나 내 주 업무는 수업이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아이들과 공감하는 것이란 생각엔 늘 변함이 없다. 아침에 눈 뜨면 죽기보다 출근하기 싫은 직장인이지만 학교만 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팔팔 뛰어다니는, 교직이 천직인 선생이다.
그리고 나는 한 사람의 연인이자, 새로운 가정을 꾸리기 위해 준비 중인 예비 신부다.
한 사람의 인생이 오는 것이 결혼이라 내 깜냥이 충분한지 확신할 수 없어 꺼리던 게 결혼이었다. 마흔이 되고서야 이제 겨우 나답게 살 수 있게 되었는데, 아내 혹은 엄마 혹은 며느리라는 낯선 역할들에 치여 또다시 나를 잃진 않을까 염려되고 두려웠다. 그렇게 외면하던 그의 구애를 받아들인 건 그의 아내라면 내 이름을 버리지 않고도 자연스레 수많은 역할들을 해낼 수 있으리란 묘한 확신이 섰기 때문이었다. 무엇이 됐든 네 잘못이 아니라는 그의 말 한마디는 무모한 확신 일지 모르나, 그 순간의 울림이 오래도록 지속되리라 믿는다.
삶은 곧 연극이다.
이름보다 역할이 주가 되고 그 위치와 상황에 나를 맞추어 나가느라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 역할들을 무탈하게 해내는 건 분명 가치 있는 일이나 그 역할 속 나를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내게 주어진 역할에 대한 내 소임도 잃지 않고 즐기되, 그 역할에 잡아 먹히진 않도록 나를 나답게 성찰하는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