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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rpe diem Nov 22. 2020

EP26. 마음을 움직이는 건 바람이 아니다

알랭 드 보통 인생학교 중 <관계>를 읽고

 남자만 그득그득한 반 수업에서 절대로 말해주지 않는 내 나이를 저들끼리 한참을 추측만 하다, 나를 약 올릴 심산으로 남자친구는 있는데 왜 결혼은 안 하냐며 못하는 거 아니냐고 도발을 했다. 그런 녀석들이 귀여워서 이번 달에 결혼한다고 폭탄선언을 해버렸다. 그랬더니, 생전 관심도 없던 녀석들이 필기를 하다 꾀가 나면, 남자친구에 대한 질문을 한 번씩 던지곤 한다.

 “그럼 선생님 남자친구는 취미가 뭐예요?”

 게임을 좋아하는 녀석들에게 핸드폰 좀 그만 하라고 핀잔을 줬더니 대뜸 묻는다는 질문이 고전적이다. 최소한 게임이 취미는 아니라고 대답하고 그 사람의 취미는 나에게 편지쓰기라 대답해 주었다. 여기저기 야유가 쏟아지고 토악질하는 시늉들이 이어진다. 그러든지 말든지 수업을 이어가려는데 한 녀석이 말을 얹는다.

 “다 한 때예요. 즐기세요 쌤.”

 열여덟 남학생이 마흔인 나에게 세상 다 산 사람처럼 던진 훈계가 어이가 없어 기가 찬다. 아직 연애다운 연애는 시작도 안 해 본 녀석들의 속 빈 말이었지만 그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니, 그래서 즐기고 있노라 답해주었다.


매주 도착하는 그의 편지


 그는 매주 나에게 손편지를 쓴다. 그렇게 그에게 받은 스물여덟 번째 편지를 읽으며 그와 공유하게 될 일상이 켜켜이 쌓여갈 앞으로가 기다려졌다.


 나는 관계에 있어서 현명한 듯 그렇지 못하다. 나의 직장인 학교에서 아이들과의 관계, 선생님들과의 관계에서는 적당히 현명하다고 자부할 수 있지만 연인과의 관계에서 난 늘 현명하지 못했다. 내 기준은 엄격했고 상대가 그 기준에서 벗어나면 가차 없이 굴었다. 물론 그 기준에 대한 허용 여부는 그를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따라 느슨해지기도 엄격해지기도 했으므로 지극히 주관적이고 유동적이었으나 대체로 난 유연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은 자기 고집이 강한 나를 염려했고, 난 결국 혼자 살기로 마음먹었다. 아이를 좋아해서 내 아이를 낳고 싶어서 결혼을 하고자 하였으나, 정말 마음을 맞추고 살아야 할 배우자를 배제한 결정이었으므로 옳지 않았다. 누군가와 어우러져 평생을 사는 건 생각보다 고역이고 상당히 많은 노력과 인내가 필요한 일이란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내가 다음 주에 결혼을 한다. 서른아홉에 혼자 살기로 마음먹은 내가 한 해만에 결정을 뒤집을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그의 노력 덕분이다.

 내가 그에게 마음을 열고 그의 배우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은 가장 큰 계기는 그의 애정 어린 시선 때문이었다. 그보다 나이가 많은 나를 그는 늘 아이 대하듯 한다. 부서질까 소중하게, 마음 다칠까 염려하며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아이 대하듯 한다고 해서 존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나의 생각과 글을 존중하고 때론 존경하며 그 생각과 마음을 아낌없이 위해준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나보다 네가 어려서~'라는 전제를 붙일 이유가 없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강한 바람이 아닌 따스한 햇살이란 걸 그는 너무나도 잘 안다.



알랭드 보통 인생학교 중 <관계> 68쪽 ‘아이 같은 배우자’ 중에서



 ‘남편은 큰아들 하나 더 키운다는 심정으로 살면 된다’는 말에 난 반감을 갖고 살았다. 왜 나와 동등한 관계인 남편을 아들 대하듯 희생하며 살아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어린아이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아이에게 책임을 묻고 원인을 찾는 건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일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등한 입장의 어른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에는 익숙지 않다. 당연히 도덕적 옳고 그름은 배제한 채 상대를 이성적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자신의 기준과 편견을 상대에게 우선 작용하며 서운함을 담아 비판하거나 비난한다. 그러므로 '아이 같은 배우자'라는 마음을 가져야 상대를 이해하는 폭을 넓힐 수 있다. 물리적 나이를 등에 업고 무겁게 어른이 된 내가 완전하지 않듯, 배우자도 마찬가지다. 서로 불완전한 존재라는 걸 인식하고 인정하는 단계가 선행되어야 불필요한 다툼을 줄일 수 있다. 이렇게 내 단단하던 아집은 또 한 번 무너졌다.



상대에 대한 연민은 생각보다 관계를 윤택하게 만드는 윤활유가 되어 주기도 한다.


 한 사람만 바라보는 그의 순수함도, 변치 않는 마음을 다짐하는 그의 무모함도 언젠가는 변할 것이다. 사라지거나 180도 달라지는 게 아니더라도, 그 정도나 형태가 조금씩 달라지는 건 당연한 일이기에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건 각오하고 있다. 낭만주의 애정관보다는 고전주의 애정관이 좀 더 편안한 나에게 미래를 약속하는 그의 다부진 결심이 얼마나 낭만적인지 나는 잘 안다. 그러나 결국, 그 찰나의 반짝임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또한 잘 알기 때문에 난 그의 아낌없는 사랑 표현이 늘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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