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 없이 널을 뛰던 순간들에 대하여
지금은 굳이 동행하지 않아도 저들끼리 갈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조카들과 놀이터에 가지 않은지 꽤 오래되었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7살, 8살이던 두 조카의 손을 양손에 하나씩 잡고 놀이터에 가서 성가실 정도로 자주 그네를 밀어주던 때가 그리워질 만큼 너무 많이 커버린 조카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요즘, 두 발에 힘이 들어가고 양 손엔 더 힘을 줘서 최대한 멀리 밀어 올려주면 세상 즐겁게 웃어대던 조카들의 웃음이 종종 생각이 난다. 그네 앞에 양손 가득 힘을 주고 발을 구르는 건 어려서나 어른이 되어서나 매한가지지만, 도약하기 위해 발을 구르는 조카들의 잰 두 다리가 한없이 가벼워 어린 시절 내가 새삼 그리워지곤 했다.
어려서부터 나도 그네 타는 걸 좋아했다.
앉으면 엉덩이 모양대로 푹 꺼지는 놀이터 그네의 아늑함에, 녹슨 그네 손잡이의 쇠 냄새가 오래도록 남아도 마냥 좋았다. 발을 떼고 두 발을 앞뒤로 구르면 조금씩 하늘과 가까워지는 그 설렘을 만끽하고 싶은 마음에 그넷줄을 감은 손엔 힘이 들어가고 더 세게 발을 굴렸다. 누군가 뒤에서 밀어주지 않아도 도달할 수 있는 최대치를 내 힘으로 달성하고 발로 하늘을 향해 하이파이브를 날린 후에야 하늘과 마주하는 짜릿한 순간은 땅을 바라보는 수만의 시간에 비해 너무 짧은 찰나임을 깨달았다. 아무리 굴러도 결국 땅에 닿아야 할 다리라면 가장 높이 올랐을 때 땅에 착지해 가장 멀리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어딘지 확인해 보고 싶어 꽤나 위험한 높이에서 훅 몸을 날렸다. 다리보다 먼저 착지한 엉덩이는 시퍼렇게 멍이 들었고, 두 팔로 온몸을 지탱한 탓에 손목은 시큰해졌다.
두 발로 착지할 수 있는 지점을 확인하려다 엄한 데 상처만 남기고 패잔병처럼 집으로 돌아온 후 한동안 놀이터에 가지 않았다.
그때부터였을까?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잘 모르겠지만 비현실적인 판타지나 공상보다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어쩌면, 좋아한다기보다 현실만으로도 내 삶은 충분히 벅차서 굳이 공감하기도 어려운 판타지에 열광할 여유가 없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 모르겠다. 판타지를 좋아하면 현실을 부정하고 원망할지도 모른다는 흑백논리에 갇힌 기우라 해도 할 말이 없다. 그렇게 난 예나 지금이나 지독한 현실주의자다.
그래서 난 결혼이 싫었다. 아주 가끔 타고 싶은 그네처럼, 사랑이 하고 싶으면 연애를 하면 그만이지 굳이 결혼으로 얽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새로 추가하고 싶지 않았다. 대놓고 이타적이지도 못하면서, 마음 놓고 이기적일 줄도 모르는 나는 새롭게 얽히는 가족 관계 속에 매몰되어 버릴 게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그렇게 난 주체적인 척 비겁했다.
이제는 남편이 된 그와의 연애는 어지럽지 않을 만큼 잔잔했으나, 묘하게 벅찼다. 내려와야 할 때가 언제인지 생각할 겨를조차 주지 않았지만 부담스럽지 않았고 결혼을 이야기하는 그의 말도 마냥 버겁지 않았다. 심지어 결혼을 말하기에 우리가 만난 시간이 너무 짧지 않냐는 내 질문에 백여 일 동안 백 번을 만난 우리가 오래 만나도 몇 번 만나지 않은 연인보다 못할 게 있냐는 그의 말은 우문현답이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내 마음을 향해 부지런히 발을 구르는 그의 템포에 한없이 널을 뛰는 내 마음도 내려올 줄 몰랐다. 결국 연애와 결혼을 백과 흑, 하늘과 땅, 판타지와 현실로 본 내 이중잣대는 생각보다 무른 아집인지도 모른다고 느낀 순간, 기적처럼 찾아온 축복이와 함께 예쁜 가정을 꾸리고 싶단 단꿈은 현실이 되었다.
그네가 주는 쾌락의 한계에 스스로 상처 받고 한동안 발길을 끊은 놀이터처럼 난 삶에 있어서도 주체적인 척 비겁한 순간들로 가득했다.
어른이 되고도 꼭 타고 싶은 그네가 하나 있어 버킷리스트에 담아두었다. 코로나가 잠식되는 그 날, 사랑하는 내 남편과 아이와 함께 그네를 타러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