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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rpe diem Dec 28. 2020

EP30. 올 연말엔 사주 보러 가지 않기로 했다

새로 고침

 

 원래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거나 설레는 편이 아니지만 올해는 크리스마스도 연말도 영 흥이 나질 않는다. 되려 의무적으로 ‘아, 크리스마스지.’하며 캐럴 들으러 카페에 가서 커피 한 잔 시키던 일상도 카페의 모든 메뉴가 테이크 아웃만 가능해진 현 상황에서는 불가능이다. 화려한 크리스마스 트리도 대형 백화점이나 가야 구경이 가능한 시대가 되어버렸다. 5인 이상 집합 금지 명령까지 내려진 마당에 연중행사처럼 치르던 연말 모임들도 사라진 지 오래다. 굳이 북적이며 연말을 즐기지 않아도 되니 다행스러우면서도 한 해가 가는지 새해가 오는지조차 구분하기 어려워진 지금이 영 편치만은 않다.


잠깐 들른 카페에서 만난 크리스마스의 흔적


 동생 집에 모여 소소하게 파티를 하는 것으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것이 일상이었으나, 밖이 아닌 집일지라도 주소가 다른 5인 이상의 가족 모임은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각자의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기로 했다.
 다행스럽게도 올해는 내 짝꿍이 생겼고(하마터면 우울하게 잠으로 무료한 크리스마스를 보낼 뻔했다) 우리끼리 보내는 첫 크리스마스이면서 단둘이 보내는 크리스마스는 올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기 때문에 거창하진 않지만, 온전히 서로에게만 집중하는 1박 2일을 보내기로 했다.

 “여보가 사고 싶었던 핸드폰 이제 사자.
   픽업은 크리스마스 아침에 하는 걸로 하고,
   그날은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  
   여보는 가만히 있는 날이야.”


 어느새 익숙해진 ‘여보’라는 호칭이 그와 나의 입에서 자연스레 오고 갈 정도로 결혼도 연애만큼이나 빠르게 익숙해지고 있는 요즘, 나에게 온전한 하루를 선물해 주고 싶은 그의 마음만 한 선물이 또 어딨을까 싶어 설레는 마음으로 기꺼이 받기로 했다. 결혼 전부터 출시일만 기다리고 있던 핸드폰이고 돈도 물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어쩐지 결혼을 하고 나니 좀 더 쓰고 나중에 망가지면 바꿀까 망설이며 미루고만 있었는데. 나 대신 온라인 주문 창에 결제를 완료하며 씩 웃는 그가 예쁘고 고마워 꼭 안아주었다.


크리스마스 아침에 배달 된 그의 편지


 크리스마스 당일 아침, 핸드폰 픽업을 위해 서둘러 외출 준비를 마친 후 거실에 나왔더니 커다란 편지봉투가 놓여있다. ‘주간 이정훈(매주 그에게 도착하는 편지)’이구나 싶어 씩 웃으며 봉투를 열었더니 신문만 한 편지지 두 장에 빼곡하게 써 내려간 그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꾸준한 마음이 언제까지 갈까 짓궂게 자주 묻는 내 질문에 대한 대답까지 살뜰히 담아 선물해 준 아침은 따스했다. 핸드폰을 찾고 집으로 돌아와 익숙하지 않은 주방에서 바쁘게 차려 준 저녁이 생각한 것보다 근사해서 그 어느 때보다 요란한 크리스마스를 보내며 마음껏 행복했다.




 돌이켜보면 매년 이맘때쯤, 새로운 한 해를 또 어떻게 보내야 하나 사주나 타로를 빌려 인위적인 기대감을 만들곤 했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패배만 거듭하는 내 삶이 어디로 흐를지 종잡을 수 없었던 과거의 꼭짓점마다 더 이상의 희망도 위기의식도 귀찮아질 때면 늘 ‘운명’을 소환해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고 스스로 채찍질하기 바빴다. 오행을 두루 갖춘 보기 드문 사주로, 남들보다 기가 막히게 좋은 운명을 타고난 내게 아직 기회가 오지 않은 것일 뿐이라며 다독이면서 나이 먹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이제는 사주에 기대지 않기로 했다.


 결혼 운, 자녀 운이 들어섰다는 말을 들은 지 수년이 지났으나 그 희망 고문을 내려놓고 오롯이 혼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순간, 운명처럼 나타난 사람이 하필 닭띠인 나와 공통분모가 전혀 없어 서로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토끼띠 남자라니, 사주를 맹신하는 편은 아니지만 어쩐지 맥이 탁 풀린다. 타고난 운명은 덤일 뿐 내 인생의 행복은 내가 규정하는 것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든, 운명처럼 다가온 타이밍을 기꺼이 쌍수 들고 환영했기 때문이든 어찌 됐건 예상치 못한 상황이 삶이 되고 선택이 된 지금 나는 내 삶에 충실해야 한다. 나와 내 선택과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믿고 함께 꿈꾸고 노력하기에도 나의 시간은 바쁘다.

 아직 한참인 생이지만 마흔이 되면서, 심심치 않았던 내 지난 시간 덕에 두 팔 벌려 마흔의 나를 환영할 수 있게 된 거란 확신이 생겼다. ‘확신’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쓰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그만큼 지키고 싶은 것들이 생겼으니 마음껏 행복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마흔하나를 사흘 앞둔 오늘, 숫자에 불과한 나이지만 늙어감에 슬퍼하지 않고 설레는 나에게 더 이상 사주풀이는 의미가 없다. 개인적으로 ‘내년에도 올해만 같았으면’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해를 맞이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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