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 혹은 끌림
끌림 : 무언가에 관심이 가거나 마음이 가는 것
결핍 : 1.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지거나 모자람
2. 다 써 없어짐
수년 전 어느 봄날, 지금처럼 꽃은 만개하였으나 시들시들 영 흥이 나지 않았다. 이별 후유증에 한겨울 추위를 오롯이 견뎌야 했던 내게 봄은 무의미했고 오래도록 자처한 시달림에 몸살을 앓았다. 비어버린 자리는 쉽사리 채워질 줄 몰랐고, 무언가로 채우려 노력하는 것조차 힘에 부쳐 결국 마음의 결핍을 자인하기로 했다. 방향을 잃은 마음은 헤매는 대로 두고 일에 집중하다 보니 조금씩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봄은 무르익어 5월 말, 누군가 나를 궁금해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다른 층, 다른 부서에서 근무하는 복사기 옆자리에 앉은키 큰 남자’를 아느냐 묻는 동료의 말에 어렴풋이 떠오른 실루엣이 전부였으나 같이 일하는 동료 교사에게 연락처를 못 줄 이유 또한 딱히 없을 듯하여 승낙하고 돌아서서, 그를 수식하는 단어가 ‘복사기’와 ‘큰 키’가 전부라는 게 싱거워 피식 웃었다. 비록 ‘피식’에 그쳤으나 참 오랜만에 자연스레 터진 웃음이었다. 봄에 어울리는 미소가 스스로 반가워 상기된 목소리로 동료와 수다를 떨며 점심을 먹으러 나서는 길, 핸드폰을 바라보며 미소를 띤 채 걸어오는 ‘복사기 옆 키 큰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한 번도 의식한 적 없는 그 사람의 존재가 준비 없이 훅 밀려들어 각인된 순간이었다.
‘안녕하세요? 점심 드시러 가나 봐요.’
어색한 목례를 나누고 교문을 나서자마자 도착한 메시지는 그가 내게 건넨 첫인사였다. 통성명도 호구조사도 없이 일상을 공유해버린 우리는 그 날부터 틈만 나면 수다를 떨었다. 같은 과목을 가르치고 비슷한 취미를 즐기고 같은 작가를 좋아하고 음악 취향까지 닮아있는 우리는 금세 끌렸고, 내 마음은 뒤늦은 봄바람마냥 쉼없이 일렁였다. 서른하나의 O형 여자와 스물여덟의 B형 남자가 만나 순식간에 사랑에 빠지는 일이 가능하리라 예상 못했던 내게 그 해 오뉴월은 꿈결같았다. 3월 첫 출근길, 자리 없는 마을버스 한켠에 기대어 선 나를 처음 본 그는 같은 정류장에 내려 나를 따라 걸었고 같은 학교로 걸어들어가는 내 뒷모습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며 뒤늦은 고백을 했다. 웃지 않는 내 모습마저 좋았지만 왜 잘 웃지 않을까 궁금했다는 그에게 환하게 웃어 보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복도에서 만나면 남몰래 서로를 보며 웃고, 혼잡한 점심시간 몸이 부딪힐 정도로 가까워지면 찰나에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풀곤 했다. 사랑에 빠지는 건 생각보다 수월했으나 자연스러운 설렘이 편치만은 않았다. 학교 앞 작은 원룸에서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을 졸랐다. 사랑한다는 표현을 결혼이라는 단어로 점철시켜야 하는 현실이 너무 어려워 이별한 내 지난 결핍은 현실감각이라는 단어로 잘 포장된 채 누군가에게 끌리는 마음에 훼방을 놓았다. 현실보다 이상이 앞선다며 그를 나무랐고 뜻하지 않은 사소한 다툼들로 이어져 머지않아 우린 결국 이별했다.
‘컴퓨터 바탕화면까지 당신은 참 한결같아. 아참, 나 새로운 일 시작하기로 했어.’
얼마 전, 그는 여느 때처럼 뜬금없이 인스타그램 메시지로 자신의 안부를 전해왔다. 아이들과 찍은 졸업 사진이나 소풍 때 단체 사진들을 하나로 모아놓은 이미지를 노트북 배경화면으로 설정해 놓고, 새로운 아이들과의 만남을 준비하며 적은 내 게시글을 보고 핀잔하듯 안부를 묻는 그 또한 불쑥 일상을 공유하는 모습엔 변함이 없었다. 새로운 일을 대뜸 시작하는 것마저 여전했다.
‘늘 그랬듯 넌 잘 해낼 거야.’
‘그러고 보니 내 인생의 전환점엔 늘 당신이 있었어. 고마워.’
그렇게 그와 나는 여전히 비슷한 것들을 좋아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삶을 응원하며 살아가는 중이다. 사랑은 짧았지만 미진한 끌림만으로도 관계의 이유는 충분하다. 결핍과 끌림은 묘하게 공존한다. 모자라거나 닳아 없어진 마음자리에 일상처럼 누군가를 초대하는 것은 늘상 오는 봄처럼 자연스럽고 눅진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