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쨍아리 Sep 25. 2024

내과, 외과, 이기적인 마음

보호자가 항상 환자만을 위할 순 없다

할아버지를 모시고 옆에서 걸음을 맞춰서 걷는다. 

우리가 걷는 곳은 병동 복도. 목표는 같은 층 휴게실이다.



내가 언제 이 속도로 걸어 봤을까. 

간병하는 동안 걸음을 맞췄는데도 익숙해지지 않는 느린 걸음 속도로 천천히 휴게실에 도착했다. 

내 걸음으로는 1분도 안 걸릴 만큼 가까운 거리. 

그 잠깐을 걷는 동안 많은 환자들을 마주쳤다. 



이동식 링거밀대를 밀면서 걷는 그들의 허리춤엔 피주머니도 하나씩 달려있다. 링거밀대에 꽂혀 있는 여러 가지 색색의 수액을 동시에 맞으며 허리에 칭칭 꽉 감은 복대를 하고 천천히 괴로운 걸음을 하는 환자들을 마주치며 우리도 걸어갔다. 외과 병동에 있는 동안, 할아버지와 내가 계속 마주했던 풍경이었다.






큰 병원에 다양한 병동이 있는데, 그 중 외과병동에서의 산책시간은 그러했다. 

대표적인 진료과인 내과와 외과, 두 병동을 비교하자면 다른 점이 참 많겠지만, 

그 중 내가 느낀 것은 분위기가 정말 많이 달랐다는 점이다. 



할아버지를 간병하며 두 병동을 모두 경험할 수 있었는데, 

앞서 말한 것은 외과병동에 있을 적의 마주한 상황이다.



내과 병동에서는 피 주머니를 단 환자들은 없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꽤나 무거웠다. 

환자들과 보호자들은 모두 상당히 예민했는데, 그 예민함은 주로 식사와 화장실 시간에 더 잘 드러났다. 



내과에서는 무엇을 얼마나 먹었는지, 화장실 이용 상황까지 일일이 기록해야 했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고령이라 보호자가 이를 도맡았다. 

밀착 기록을 해야하는 것 뿐 아니라 먹어야 하는 약의 종류도 외과와는 달랐다. 

약의 가짓수도 훨씬 많고, 먹는 시간은 또 각각 달랐다. 


의료진이 미리 약 준비를 해주며 시간을 일러줄 경우, 그 시간을 지켜 먹여야 했다. 

이렇게 환자와 보호자가 서로가 계속 붙어서 무언가를 해야 하는 병동이 바로 내과였다. 



때문에 가까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로의 예민함이 폭발하는 것을 보는 것도 예삿일이었다.

나에겐 날카로워진 내 모습을 할아버지께 감추는 것이 이때의 미션이었다.





반면, 외과 병동에서는 보호자의 역할이 비교적 덜 부담스러웠다. 

할아버지를 비롯해 환자들은 외과적 처치로 인해 거동이 제한된 상태였지만, 

밀착 기록은 필요치 않았기에 빈 시간이 생길 때 보호자는 비교적 자유로이 병원 안을 활보했다. 

잠깐 도시락을 사러 간다든지 등등. 


다만, 잠깐씩 환자의 움직임을 도와야 했다. 

주로 화장실을 가거나 회복을 위해 잠시 산책을 할 때에 보조가 필요했다. 

허나 그 외에는 딱히 크게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만약 두가지 진료과 중에 간병을 선택 할 수 있었다면 외과를 선택했을 것이다. 

(물론 보호자 입장만 생각한다면).



할아버지는 외과병동 입원 중에 외과적 치료가 모두 종료되어 내과 병동으로 옮겨 갔다. 

그저 병동만 옮기는 것인데 나는 보호자로서 역할이 커지는 듯한 부담감을 느꼈다. 

내과 병동 특성상 필요한 밀착기록이나 먹는 약 챙기기 등등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는 꽤나 고령인 편이라, 거동도 도와야했기에 

항상 곁에 있어야 함이 부담인 것이다. 



병동을 옮겨서 자리를 잡고 누워있는 할아버지를 그대로 둔 채 

아주 잠깐 병실 밖에서 짧은 통화를 했다.



“엄마, 이따가 나랑 교대하면 잊지 말고 보호자 정보랑 할아버지 드시는거, 

화장실 가시는거 적는 거 알지? 그거 다시 해야되” 

“아 그거 다시 해야 하는 거야? 후...”





엄마와의 대화는 보호자 간의 업무소통이었고, 

그 팍팍한 대화 속에서 그녀는 점점 지쳐간다는 티를 마구 냈다.

그 앞에서 차마 나 또한 지쳤다는 표현을 할 수는 없었다.



내과와 외과를 번갈아 가며 입원 생활을 하는 동안

활력과 기운을 점점 차리며 회복하는 할아버지와는 반대로, 곁에 있는 두 K장녀는 피로감이 쌓여갔다.

이걸 멈출 수 있는 건 퇴원 뿐. 퇴원을 바라는 날들이 이어졌다. 

환자가 아니라 보호자 우리 자신을 위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게 K장녀들에겐 너무 이기적이고 못된 생각이라는 느낌에

의료진에게 퇴원시점을 물을 때엔 에둘러 할아버지를 위한 질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살다 보면 이런 간사한 마음이 드는 순간들이 꽤 많다. 

나와 내 가족의 미래를 위해,재정적인 지원이 되었던, 직장에서의 업무가 되었던, 우선순위를 뭐로 두어야 하는지 너무 명백한 상황 속에서 찾아왔다. 


‘나 자신’의 불편함을 우선순위보다 더 앞에 두려고 생각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

나는 그렇게 내 스스로가 맘에 들지 않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드는 간사한 마음은 또 다시 ‘나’를 앞에 두더라.



하지만 본래의 간병 목적이었던 할아버지의 회복.

그 회복의 과정을 찬찬히 눈으로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이런 것들은 나의 지치고 힘든 상황을 조금씩 잊고 정진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다른 어떤 상황에서든 누군가 굉장히 이기적인 것처럼 나에게 대한다면, 혹시 그 분은 지금 그에게 일어난 어떤 일에 대한 본래의 목적을 잠시 잊었거나 흔들리고 있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흔들리고 부딪히고 깨지면서 그 방향을 찾아가는 중일지 모르고.






나도 간병하는 동안 수없이 흔들렸다. 포기한게 한 두 개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걸 버틸 수 있었던건 할아버지 병세에 차도가 생기고 하루가 다르게 활력을 찾아가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내 본연의 간병 목적을 떠올려주기에 충분했다. 



할아버지를 보고 다시 마음을 다잡았듯이, 이기적인 마음이 들고 흔들릴 때에 내가 이 자리에 왜 있는지 생각 해봐야 하지 않을까.




퇴근 후 어김없이 집안일을 하고 있노라면, 또 이기적인 생각이 또 스물스물 피어오른다. 

“왜 나는 바로 쉬지도 못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을 쓸고 닦아야 하는거지? 여태 앉지도 못했어.” 



집안일을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쯤, 내 옆에 하얀 털복숭이 얼굴이 다가온다. 

얼른 끝내고 놀자고 초롱초롱 눈빛을 보내고 있는 하얀색 우리 고양이를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저절로 청소기가 손에 들려진다.



아 그래 맞아. 집안일을 하나씩 해 나가는 것처럼, 하나하나 집안을 돌보는 걸 멈출 수 없는 게 원래 내 역할이지. K장녀는 그렇게 내 가족의 안위를 누구보다 살피는 사람이잖아. 


저기봐 우리 고양이도 나만 보고 있잖아. 어~ 그래 얼른 하고 놀아줄게. 고양이 얼굴에 그만, 지금 하기 싫던 청소와 집안일의 의미와 이유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고마워 제리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