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알린 후 연락이 참 많이 왔다. 여기저기서 오는 연락들을 받으며 내가 이렇게 인간관계가 좋았나? 싶었다. 다들 한마디씩 위로의 말을 건넨다. 위로의 말이 참 따뜻해서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사실 그렇게 와닿지는 않는다. 그냥 어안이 벙벙할 뿐.
아픈 사람은 내가 아니니까, 나에겐 위로가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저 아픈 할아버지 옆을 지키는 사람일 뿐인데 무슨 위로가 필요하지? 내 할 일을 하는 것 뿐인데? 다들 각자의 삶도 충분히 고생스러울 텐데 굳이 왜 나에게 위로를? 굳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들의 위로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들의 마음이 예뻐서, 그 말들이 참 따뜻해서 계속 듣고 싶었다.
보호자의 역할을 하는 건, 간병 이전에도 내가 느꼈던 “당연히 할 일을 한다”의 연장선이었다. 사실 객관적으로 희생한 것이 많긴 하다. 멀쩡히 잘 다니던 일을 다 그만두고 정리했고 (덕분에 수입도 없어졌다. 가장 큰 타격이었다), 내 개인 시간은 커녕 제대로 씻을 시간도 없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위로의 말들은 어색하게만 들렸다.
나를 희생해야 한다는 그 ‘의무감’이 나에겐 너무 당연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그 정도로 당연하지는 않은가 보다. 아마 그래서 위로를 건네는 걸까? 이번에 K장녀 특유의 ‘의무감’으로 나의 일부를 포기하고 희생한 것은 반은 내 선택이고 반은 선택을 당한 것이다. 사실 좀 수동적으로 선택했다.
결코 내가 자원하여 먼저 나서서 간병 생활을 하겠다고 하진 않았다. 할아버지의 입원이 결정되고, 가족들이 간병에 대한 주요한 역할을 논의하는 가족회의 자리가 있었다. 나는 거기서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내 생각과 의견을 내기 보다는 ‘도리를 다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논의와 결정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갔지만, 결론은 나였다. 당첨!
사실 이럴 줄 알았다. 어떤 이유로 내가 선택되었는지 그 이유는 중요치 않았다. 가족들의 의견으로 결정된 것이고 그 말은 즉, 내가 할 일이라는 것. 그냥 하는 거지 뭐. 나도 그렇지만, 다른 가족들도 이 결론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들의 모습에서 미안한 기색보다는 당당함이 보였고, 그로 인해 내 처지는 더욱 당연하게만 보였다.
지인들로부터 할아버지의 병세에 차도가 좀 생겼냐며 내 상태가 어떤지 묻기도 하는 위로의 메시지가 간간히 날아온다. 내 지인들이 의도한 ‘위로’는 내게는 ‘위로’ 그 본연의 역할로 다가오지 않는다. 나는 그냥 이런 이슈가 생겨서라도 그들과 따뜻한 말 한마디 더 나눌 수 있고, 전화 한 통으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그 중 몇몇은 정말 감사하게도 면회의 의사를 비치기도 했다. 코로나 비상사태는 해제된 지 오래지만, 아직 병원에서의 면회는 그렇게 녹록지 않다. 원칙적으로는 정해진 보호자 말고는 안된다고 보면 된다. 그렇게 ‘원칙’을 핑계 삼아 모두를 거절했다.
나는 자기 객관화가 잘 안되는 건지, 위로가 필요없을 만큼 괜찮은게 맞는건지. 아무렇지 않다고 확신했던 나는 오히려 괜찮냐고 묻는 말들에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 가족 외의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내 희생의 당연함이 정말 확고했다. 위로를 한 두 개쯤 받았을 때는 믿지 않았다. 예의상 하는 말이라고 여기며, 내 확신을 굳게 잡고 이 간병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계속 이어지는 위로의 말이 확신에 의심을 가져왔다.
그 확신이 무너지기 시작하니, 병상 옆을 지키며 ‘아 이게 힘든 일이구나’ 싶은 생각이 저절로 스며들었다. 그렇게 병원 안에서의 내 간병 생활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눈에 마치 어떤 필터가 씌워진 것 같았다.
나란 사람이 지금 이 상황에서 당연히 할 일이라 생각했기에 불평, 불만을 일절 생각하지 않았던 내 불편함들. 먹는 것 씻는 것 뭐하나 편하지 않았고 드라이 샴푸로 머리를 비벼 감으며 버티는 일상들. 그러면서도 나보다는 환자를 먼저 생각해야 하고, 환자의 빠른 치료를 위해 애써야 하는 이어지는 생활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상황이 언제쯤 마무리되고 일상으로 돌아갈지 그 시점을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점이 힘듦에 그 무게를 더 했다.
그 필터가 씌워진 시선으로 내 생활을 돌아보다 가장 가까이 있는 타인들, 같은 병실의 다른 환자 보호자들을 보았다. 그들의 일상도 나와 다르지 않다. 잠깐 필요한 물품을 사러 매점에 들르는 것 조차도 마음 편하게 다녀오지 못하고 후다닥 헐레벌떡 돌아오는게 보인다. 그러니 잠깐의 식사나 볼일 또한 편치 않을 것이다. 나처럼. 그럼 혹시 그들도 언제 일상으로 돌아갈지 모르는 희생을 하며 지금의 수고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그저 해야만 하는 일이니 묵묵히 해내고만 있는 걸까. 그들에게도 혹 내가 받은 위로가 필요하지는 않을까.
나는 위로를 받고서야 나는 환자를 위해 간병을 하며 내가 희생한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 어렵고 불편함을 감내하며 해내는 생활을 견뎌내야 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또, 가족을 위해 이 일은 내가 직접 하고 싶은 마음도 가슴 한구석에 동시에 존재한다. 난 K장녀니까. 그럼 나는 무얼 원하는 걸까? 특별한 보상을 원하는 걸까? 아니면 괜찮아 질 때까지 계속되는 위로?
“감사함”의 반대말이 당연함이라고 한다. 그래 나는 어쩌면 고맙다는 말이 듣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간병을 나에게 맡긴 다른 가족들에게,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가족이라는 이유, 가장 효율적인 간병이 가능하다는 이유, 아니면 자원해서 등등 환자의 옆에 있는 보호자들이 그 위치에 있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그런 이유가 커다란 당위성이 되어 그 희생들의 귀중함을 누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르지 않는 방법은 간단하다. 감사 인사. 우리 누구나 앞으로 간병이 필요한 상황이 언제 어떻게 오게 될지 모른다. 큰 병이 아닌 몸살같은 거라도 누군가가 곁에 있어준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귀한 존재이다.
앞으로 내가 아플 때 누군가가 옆에 있어준다면 그 감사함을 충분히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나는 간병이 끝나고 이 글을 쓰는 오늘까지도 고맙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