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한없이 바보같아 보였다. 어느 날부터 그녀의 바보같은 모습들에 왜 내가 좋아한다고 고백했는지조차 까먹어버렸다. 결국에는 난 바보같은 그녀를 떠나갔다. 십 년을 연애를 했지만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말이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세상에서 가장 바보가 나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더 몇 년이 지났다.
무엇 때문일까. 이상한 감정이 밀물처럼 천천히 차오르기를 여러 번, 그때마다 무어라 해명할 길이 없는 것이 날 허우적되게 한다. 두려움, 공포, 초조함, 고통 이런 것이 아닌 태초에 인간을 몰아세우기 위한, 모습이 없는 괴물 같았다.
목적을 잃게 된다. 이유를 잃게 된다. 그러면 선택은 하나다. 결국에는 그것이 가장 편안하고 안락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겨울날 솜 덮는 솜이불처럼 말이다.
통장에 있는 돈을 찾아 백화점에 가, 예전 같으면 망설이고 망설이다 샀을 양복과 구두, 넥타이를 구입해 그 자리에서 갈아입고 가장 조망이 좋은 음식점에 들어가 가장 먹어보고 싶었던 음식과 술을 가격표도 보지 않고 사 먹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다. 샤워를 하고 가장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방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피곤하다는 핑계로, 귀찮다는 핑계로 대충 치웠던 곳까지 깨끗이 말이다.
옷장을 정리하는데 박스 한 개가 나왔다. 분명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하고 박스를 열어보니 그제서야 기억이 났다. 그녀와 주고받았던 크고 작은 수백 통의 편지가 담겨져 있었다. 갑자기 두 다리와 두 팔에 힘이 빠졌다. 풀썩하고 주저앉았고 편지는 방 여기저기 흩어져 쏟아졌다.
그리고 티슈 한 장이 깃털이 하늘하늘 거리는 것처럼 날아다니다 내 눈앞에 살포시 떨어졌다. 티슈에는 글이 적혀 있었고, 난 그 글을 보자 어린아이가 우는 것처럼 울었다. 펑펑 하고 울었다.
‘항상 행복해야 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 당신 옆에 있게 된다 해도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녀에게 고백하고 첫 데이트 때 카페에서 그녀가 적어줬던 편지였다. 그때 난 왜 우리가 평생을 할 건데 왜 이런 말을 적었냐고 따져 물었다. 그녀는 말하지 않고 웃기만 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어쩌면 난 이순간 그녀에게 진심이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그녀는 그런 날 알아봤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왜 나의 고백을 받아주었을까.
방 주위를 둘러보다 한숨을 내뱉었다. 이렇게 된 마당에 녹아버린 초콜릿 같은 감정이라니, 어떤 결심의 허탈감이 밀려왔다. 그렇게 그날 한참을 방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있었다. 바보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