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

by J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분명 나에게 자극이었던 것들도 일상의 루틴처럼 되었습니다. 새로운 노래도 새로운 산책로도 새로운 영화도 새로운 만남도........

모든 것들이 똑같은데 하나만 바뀌는 느낌입니다. 난 그대로인데 주위 배경만 바뀌고 있습니다. 이런 감정이 따분함이라고 생각했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따분함을 해소하기 위해 무언가를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알았습니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은 따분함이라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요 그럼 무엇일까요? 저는 이감 정이 어떤 것인지 모릅니다. 다만 막연하게 그런 것이겠지 하고 생각만 할 뿐 이 실체를 알지 못합니다. 떠오르는 말이 없습니다. 유령 같은 감정입니다. 말은 할 수 있지만 믿을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안 드는 어쩌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감정입니다. 따사라운 햇살이 비추는 어느 날 먼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끔은 이감 정이 보일 때도 있습니다. 바닥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내가 보는 모든 것들이 흐릿하게 보이게 합니다. 그런 불안전한 모습이 나에 감정처럼 보이는 것 같습니다. 분명한 실체가 있지만 흐릿하게 보이기도 흔들려 보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비뚤어져 봐야 바르게 보이는 듯합니다.

이감 정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차라리 어떨 때는 고통스러웠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인가에 화가 났으면 좋겠습니다. 아팠으면 좋겠습니다. 오랫동안 고여있는 물웅덩이가 된 기분입니다.

누군가 웅덩이에 돌을 던지거나 누군가 웅덩이를 무너트리거나 누군가 웅덩이를 매우던가 해줬으면 합니다. 이상한 감정입니다.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습니다. 분명 해결책을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지만 그것을 해보기라도 해봐야 하지만 어떤 다른 나는 그냥 허공에 떠도는 말을 지켜볼 뿐입니다. 웃긴 건 가만히 있으려는 내가 나의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분이 매우 싫습니다. 울퉁불퉁한 도로 위에 한차례 소나기가 내린 후 울룩불룩한 도로 위에 물이고여있는 모습처럼 느껴집니다. 이런 나의 모습에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합니다. 모든 가만히 있는 존재입니다. 어쩌다 지나간 폐건물 같고 어쩌다 지나간 바윗덩어리 같습니다. 늘 지나다니는 길에 몇 년째 방치되어 있는 장롱 쓰레기 같은 기분이 듭니다.

무언가에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힘든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니 감정을 느끼지만 분명 나의 감정이지만 내가 느끼는 감정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먼발치에 풀들이 내가 서있는 곳까지 그늘이 지게 할 정도로 무성하게 자라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바람에 흔들흔들 거리는 풀들 사이로 햇빛이 반짝반짝 했습니다.

옜기억들이 스쳐 지나가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내가 살아오면서 느꼈던 수많은 감정들이 기억되었습니다. 왜 느껴지지 않고 기억되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내 감정이 이상하다고 느낄 때 감당되지 않을 때 내가 있는 곳 말고 지구 반대편에 또 다른 내가 있다고 상상해봐 아니 상상을 넘어 진짜 그렇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 아이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생각해봐 그리고 내가 벌어졌으면 하는 일들을 그 아이를 통해 상상을 해 만약 지금 먹고 싶은 게 있다면 지구 반대편에 내가 먹고싶은걸 먹는 상상을 하고 여행을 가고 싶다면 지구 반대편에 나에게 해외여행을 가게 해주고 내가 지금 하고 싶은 모든 것들은 지구 반대편의 나는 모두 다하는 상상을 그러면 어쩌면 지구 반대편의 나라는 존재도 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어떠한 마법 같은 주문을 걸어 줄 수 있다고....

정말일까요. 지구 반대편의 나에게 주문을 건다면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예전처럼 예전처럼 예전처럼 무얼 원하는지 조차 까먹어버렸으면 어떻게 주문을 걸 수 있을까요? 지구 반대편의 나에게 희망을 가져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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