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by J팔

새벽에 일어났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무서운 꿈을 꾸었다. 요즘 들어 식은땀이 날정도로 무서운 꿈을 자주 꾼다. 꿈속에서의 나는 필사적이고 처절하게 무언가를 지키려 피까지 토해가며 무언가를 했다는 잔상만은 남아있다. 하지만 막상 잠에서 깨어 눈을 떠보면 무미건조한 방안 어디쯤만 볼뿐이다. 하루의 시작이 설례이지가 않다. 아마 디즈니 만화동산 보지 않게 된 나이부터 그랬던 것 같다. 설례이는 감정은 아니지만 그나마 엇비슷하게 만들어주는 건 슬며시 들어오는 바람이다. 어디서 인지 모르겠지만 방안을 할랑 할랑 거리다. 내 몸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 어떤 부드러운 것보다도 부드럽게 몸을 스쳐 지나갈 때 스르륵해지느 기분이 좋다.

뇌가 부팅이 되는 과정이 번거롭다. 286처럼 말이다. 정신이 들 때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커피인데 오늘은 무얼 할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움직이기를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 무얼 할까라는 생각이 드는 건 오후 때쯤이라 막상 생각이 들 때면 늦은 시간이라 그냥 안 하고 마는데 오늘은 무얼 할까?라는 생각이 드는 시간이 적정한 시간에 생각이 났다. 무얼 해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내심 이런 기분이 나쁘지 않아 일단 씻으면서 생각하기로 했다. 생각만 하다. 막상 하려 할 때 귀찮은 기분이 들어 안 할까 봐 그냥 밖에 나간다는 가정을 하고 행동하기로 했다. 샤워하면서 무얼 할까? 밥을 먹으면서 무얼 할까? 커피를 마시며 무얼 할까? 설거지를 하며 무얼 할까? 내친김에 방청소를 하며 무얼 할까?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렇게도 하고 싶은 일이 없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는 작대기 하나 만들고 뒷동산이에 오르면 모험이고 탐험이었는데 이제는 아무런 놀이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결국은 돈이 얼마큼 들어갈까라는 문제만 남을 뿐이다. 돈의 액수에 따라 나에 도파민 수치도 틀려진다. 약간의 알딸딸함이 필요해지기 시작했다. 어제저녁에 먹다 남은 와인을 한잔 가득 따라 물을 마시듯 꿀덕꿀덕 넘겨 버렸다. 이 한잔이 밀려오는 이감 정을 막아줄 거다. 잠시뿐이겠지만 말이다.

추리소설책이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1년 전인가 읽겠다고 산 책인데 온 방구석에 여기 있다 저기 있다만 했을 뿐 정작 내 눈에 내 머리에는 들어오지 못했다. 1년 만에 다시 읽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책을 들었다. 첫 장부터 힘이 든다. 소설책 특히 추리소설책은 처음이 힘이 든다. 그것만 지나면 후루룩이지만 그 순간까지는 너무 힘이 든다 내려놓다 다시 보다 반복이다. 하지만 오늘은 기필코 이것을 다 읽고 말리라 마음먹기로 했다. 그러면 오늘 하루는 그리 나쁘지 않게 그리 아깝지 않게 흘러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 마음먹은 일은 더 안 하게 되는 듯하다. 책 조금 보다 인터넷 조금 하다 책 조금보다

딴생각 조금 하다. 책 조금보다. SNS 조금 보다. 책 조금 보다가 잠자다.

이렇게 시간이 죽어간다 무엇하나 하지 않은 채 말이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또 하루의 무미건조한 하루를 선물한다.

방바닥에 누워 이리저리 움직이다. 구석 언저리에 컵 하나를 발견했다. 아무리 찾아도 없던 컵이었는데 청소를 안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여기 있는 것을 며칠 동안 보지 못한 걸까라는 의문을 품으며 컵 안에 내용물을 보았다. 과학 고어물에 첫 장면에 어떤 과학자가 페트리 디쉬를 보는 첫 장면이 나오고는 한다. 그 과학자의 눈빛이 지금 내 눈빛과 같을 것 같았다. 예쁘게도 핀 곰팡이 이런 물질!? 에서 금방이라도 괴물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빤히 곰팡이를 보고 있는데 웃음이 나왔다. 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웃음이 나왔다. 꼭 내가 곰팡이가 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존재의 이유가 어쩌면 곰팡이와도 같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니 모든 것들이 단순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고민 따위가 아무런 의미 없는 고민처럼 느껴졌다. 그냥 조건이 맞아 태어나 때가 되면 사라지는 그냥 그런 곰팡이라 생각하니 모든 것들이 가벼워졌다. 오늘 하루의 무게 또한 말이다. 하루는 그냥 하루 무얼 하던 하루는 하루이다. 밖에나가 작대기 하나를 구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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