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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하나만 얻으면

쎈 선배의 편지

by 쎈 바람

대학 시절 저에게는 친하다는 표현보다 편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남사친이 있었습니다. 나와는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다른 모습으로 서 있던 친구였죠.

내게 영화는 그저 영화일 뿐이었는데, 영화를 굉장히 좋아한 그 친구에게 영화는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능력이 되면 영화 한 편 만들고 싶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영화를 같이 보자고 했습니다. 만나면 영화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는 친구였지만 영화를 같이 보자고 한 건 처음이었어요.

그 친구가 선택한 영화는 '비 오는 날의 수채화'였습니다. 동명의 노래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스토리를 입힌 영화가 개봉되었는데, 노래를 작사 작곡하고 불렀던 뮤지션이 참여한 OST를 제외하고는 가혹할 정도로 평단의 평가가 좋지 않았습니다. 영화에서 비 내리는 장면이 많으면 영화가 망한다는 속설이 이번에도 증명됐다는 기사도 있었어요.

그래서 왜 하필이면 그 영화냐고 물었더니, 그 친구가 말했습니다.

"비 보려고. 영화를 보면서 비만 봐. 다른 건 관심 두지 말고, 비가 어떤 장면에서 내리고 어떤 감정을 표현하는지만 살펴봐."

영화는 제목을 스크린에 담는 게 제작의 유일한 목적인 듯했습니다. 신인 배우들이 스크린에 어설픈 수채화를 그리는 동안 러닝 타임 대부분이 비로 채워졌어요.

평소 같으면 극장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는 순간부터 시간 아깝고 돈 아깝다고 불평할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친구의 당부대로 영화를 본 나는 비에 촉촉이 젖어 있었습니다. 평소 나는 우산 없이 맞을 정도로 비를 좋아했지만, 영화 속에서 내렸던 다양한 비가 주는 느낌은 새로웠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 비만 보라는 말 외에 영화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던 친구는 영화가 끝난 후 내게 물었습니다.

“비 봤어? 어땠어?”

‘영화 어땠어’가 아니라 ‘비 어땠어’라니. 그 질문에 나는 답변하지 않고 손으로 가슴만 쓸어내렸습니다. ‘봤다’는 너무 단순한 대답이었고, 그렇게 답하기엔 내 감정이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영화에서 만난 비가 주는 여러 느낌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동안 내가 영화를 보고 평가했던 태도를 되돌아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친구는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반복해서 본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스토리를 따라가며 전체적인 느낌을 살펴보고, 이후에는 주연 배우의 시선으로 보고, 음악 중심으로 보고, 색채를 따라 보기도 하고, 감독이 되어 보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영화를 종합 예술이라고 하는 이유도 감독의 예술이라고 하는 이유도 알게 되며, 영화평을 쉽게 입에 올릴 수 없게 된다고 했어요.




이때의 경험은 영화를 대하는 제 태도를 바꿨습니다. 영화를 볼 때면 영화를 만들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했을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들의 노력을 내 잣대로 재단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리고 영화를 보면서 하나만 얻으면 만족합니다. 마음에 와닿는 대사든, 공감 가는 캐릭터든, 취향에 맞는 음악이든, 새로운 디자인이든 내 마음에 담기고 나에게 영감을 주는 하나만 얻으면 그 영화에 지급한 시간과 돈이 충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태도는 영화뿐만 아니라 일상이나 회사에서도 유효했습니다. 하나만 얻으면 된다는 마음가짐이면 어떤 경우에도 과한 기대를 하지 않게 되고, 기대가 크지 않으니 작은 성취에도 감사하며 행복을 느낍니다.

모든 것에는 장단점이 있고, 호불호가 있습니다. 그런데 얻은 것보다 얻지 못한 것에 집중하게 되는 게 인간의 심리인 것 같아요. 스트레스는 장점보다는 단점, 호보다는 불호에 집중할 때 생기는 무거운 마음입니다. 그러니 거꾸로 단점보다는 장점, 불호보다는 호에 집중한다면 스트레스 따위는 날려버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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