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도 5월도 7월도 아닌
23년 1월, 지난 일주일 가량 제주 가족여행을 하고 왔다. 아들이 5살이던 2018년 이후 꼬박 5년 만이다. 꽃피는 3월, 푸르른 5월, 눈부신 7월도 아닌 왜 1월이었을까.
사실 4년 간 다닌 두 번째 직장과의 연을 마무리하고 있는 중이다. 배움도 경험도 많았지만 다시 한 해 사업이라는 챗바퀴를 앞두고 변화가 필요하다 생각했다. 꽤 유동적인 신년을 맞이하게 된 덕분에(?) 연차와 공백을 더해 두 달이라는 시간이 생겼고, 마침 방학인 아들과 물리적인 제약 없이 많은 걸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대개 방학동안 학원이 많은 시간을 대체하게 되는데, 그 또한 모두 잠시 중단하고 집이 아닌 곳에서의 생활에 몰두해 볼 예정이다. 하필 한겨울에 제주행을 택하고 나니 바다에 뛰어들 수도, 아직 어린 아들과 힘든 한라산 등반을 할 수도 없을진대 무얼 할 수 있을까. 심지어 항공과 숙소, 렌트 외엔 더 이상의 계획도 짜지 않았다. 그래도 내 최고의 여행메이트인 아내와 어떻게든 즐겁게 보내겠지 싶었다. 막상 가족과 몇 년 만에 제주행 비행기를 타려니 들뜨기도 하고 괜스레 다른 시간과 계절의 제주가 떠오르기도 했다.
1998년 3월의 제주는 고2 수학여행이었다. IMF가 온 나라를 삼키기 직전이라 난 다행히 제주행이 가능했지만, 몇 달 뒤 학생들의 모든 장거리 여행이 모두 취소되었다. 무튼 그 여행은 수학여행답게 천지연폭포, 만장굴, 한라산 등 ‘기념사진’을 찍을만한 관광지를 부단히 다녔고 밤마다 바지춤에 술을 숨기는 친구들과 그들을 잡으려던 주임선생님의 기싸움도 치열했다.
2년 뒤 2000년 7월의 제주는 대학교 1학년 동기여행이다. 국문과 남자 다섯이 친하게 어울렸는데 서울의 캠퍼스에서 만난 것치곤 서울 출신이 한 명도 없었다. 강릉, 의정부, 대전, 거제(나), 제주 이렇게였는데 서로의 고향 여행을 하기로 하고 고른 첫 여행지가 제주였다. 암튼 그때 사진을 보면 7월답게 강렬한 땡볕에 온통 새빨간 스무 살 촌스런 대학생들이 가득하다.
한참이 지나 2010년에는 그 대학친구 한 명과 당일치기 한라산행을 다녀왔다. 추운 계절이었는데 연차 하루를 같이 내고 아침 일찍 제주에 내려 백록담까지 오후 1시 반까지 올랐다가 5시까지 내려오는 일정이었다. 아직은 청춘이라 거뜬할 줄 알았는데 정해진 산행시간을 쫓기듯 오르내리고 나니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시내로 나와 흑돼지 집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맘이 급했는지 물렁뼈를 씹다 어금니가 부러졌다. 치료를 미루다 결국 임플란트를 했는데 알고 보니 그날 친구도 이가 부러졌단다. 우리 컨디션이 문제였는지 그 흑돼지가 문제였는지 지금도 모를 일이다.
2017년 5월의 제주는 부모님과 형네 가족까지 8명이 함께했다. 카니발에 카시트 2개를 설치하고 3열까지 꽉 채운 다인원 여행이었는데, 부모님과 아이들의 컨디션과 먹거리를 고려하느라 내내 분주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3대가 다 같이 한 여행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이젠 어머니 건강을 고려하면 다신 힘들 수도 있어서 지금 생각하면 정말이지 소중한 추억이다.
그리고 2018년 3월은 삼일절 연휴를 끼고 우리 가족이 처음 한 제주 여행이었다. 제주 민박이 갓 유행하던 때였는데 낮엔 열심히 돌아다니고, 저녁마다 조용한 돌담집 숙소로 돌아와 아늑하게 보낸 기억이 난다. 그리고 전후로도 국내외 많은 곳을 여행했지만 이때의 다섯 살 아들 모습이 두고두고 봐도 가장 예쁘다.
그 외 한 두 번의 출장이 있었지만, 업무가 우선이었고 당일로 돌아왔기 때문에 이번 여행이 남다르고 또 가장 긴 여행이다. 한 달 살기도 고민했지만 이왕이면 외국으로 가보기로 해서 이번 여행은 워밍업이자 휴식으로 생각하고 최소한의 계획만 잡았다. 1월이 남쪽 바다를 여행하기 가장 좋은 계절은 아니겠지만 이 시기만의 매력은 분명 있었고, 또 멀지 않은 시점 다시 여행하고픈 동네도 생겨서 만족스럽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제주가 그저 관광지로서만이 아닌 사람들과 동네의 공기가 보이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이제 열심히 찍어둔 사진들의 장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기 전에 이번 1월 제주여행기를 하나씩 풀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