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홀로 생각

당당함과 안하무인의 차이를 구분하는 사람이 되길.

by 김지한
당당하라고 자신감을 가지라고, 너는 소중하고 빛나는 사람이라고,

위로를 수 없이 건넨다.


당당해도 된다. 당당해야 한다.

너는 충분히 그래도 되는 사람이라고 넘치게 외친다.


미디어는 그렇다. SNS도 그렇다.

정치인도 그렇다.

아니 사람의 마음을 사야만 영위될 수 있는 모든 곳은 그렇게 이야기한다.


너의 마음에 드는 것만 하라고, 좋으면 된 거지 왜 눈치를 보느냐고,

다른 사람보다 너를 중요하게 생각해야지.


이제는 자존감을 높여주거나,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메시지를 넘어섰다.

자존감과 이기심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무엇이 당당한 것인지,

그리고 어떤 것이 부끄러운 뻔뻔함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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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기준은 높다.


그런 세상의 기준에 자기 최면이라도 걸어야 주눅 들지 않을 수 있다.

그래야 쓰러지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당당하다는 핑계로 부끄러운 일과 행동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뻔뻔함은 없기를 바란다.

당당하다는 이름 아래 그릇된 것과 부끄러운 것을 모르는 척 덮어버리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무작정 공감만 하는 위로로 인해 자기 성찰과 절제에서만 찾을 수 있는 인간의 고귀함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끝없는 경쟁과 경쟁이 가져오는 불필요한 희생들.
이전 세대를 아우르는 평가였습니다.

공감의 위로가 많지는 않았고,
공감의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가 있었습니다.

특히 청소년들의 대학 입시에 대한 압박과 불안이 그랬고,
청년들의 취업의 어려움과 사회생활은 인간의 바닥이라는 프레임이 점차 뚜렷하게 자리 잡으면서 무언가 (시스템이나 사람의) 잘잘못을 따져야만 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런 위로가 필요한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위로가, 무작정 모든 것이 괜찮다고 말하는 메세지가,
무책임을 동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서야 인지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불에 뛰어드는 아이에게 '괜찮아, 네가 뛰어들고 싶으면 뛰어들어도 돼'라거나,
아직 탄산음료도 못 마시는 아이에게 '술이 마시고 싶다고? 물론이지, 너의 자유야'라고 말하는 정도까지 무책임해졌습니다.

제가 이런 듣기 좋은 위로의 말들을 믿고,
함께 살아가고 있는 주변 사람들 앞에 뻔뻔한 사람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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