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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쨈빵 Mar 30. 2021

나는 무능력자

한결같은 남편에게 고함




 몇 년 전 봄날 오후, 하교 시간에 맞춰 아이들을 데리러 가는 길이었다. 나의 모든 것은 바닥상태였다.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며, 운전석에 앉아 신호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근래에 자꾸만 정신이 깜빡깜빡해서 스트레스가 심했다. 약속이나 할 일을 잊고 있다가 낭패 보는 일이 자꾸 생겼다. 교회에서 내가 맡은 일들을 대할 때면, 내 실수로 누군가 상심하는 일이 생길까 봐 특히 긴장했다. 물건은 또 얼마나 흘리고 다니는지, 많은 분들께 내 물건을 돌려받았다. 나 자신을 믿을 수가 없고, 모든 일 앞에 움츠러들었다.

 아이들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해낼 수가 없었다. 뇌가 쪼그라져 말라붙은 것 같았다. 이렇게 대책 없이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기만 하니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어떻게 수능을 보고 대학에 갔었는지, 어떻게 일을 하고 돈을 벌었었는지, 마치 나에게 없었던 시절처럼 까마득했다. 나는 한숨만 나오는 무능력자가 되어있었다.

 

 자존감은 1도 남아있지 않았다. 집 밖으로 나오기가 겁날 정도였다. 스스로의 상태를 인정하게 되니 오히려 편한 것도 있었다. 혹시 누군가 나의 형편없음을 알아채고 무시한다 해도, 크게 상처 받을 것 같지 않았다. 하루를 무사히 마치고 잠자는 시간이 되면 안도감과 함께 감사가 밀려왔다.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별 일 없이 잠자리에 드는군요. 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걸, 주님은 아시잖아요. 내일도 부탁드립니다. 저의 머리, 팔다리와 손과 발도 제발 꽉 붙잡아주세요. 저는 겁이 납니다. 매일 두렵습니다. 저를 도와주세요.’

 
 아내가 이렇게 심각한 상태인데도, 남편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는 할 일이 너무 많았고 잠이 늘 부족했다. 교회 일에 파묻혀 있는 남편이 안쓰러웠다. ‘오 주님, 저 사람도 붙잡아주십시오. 불쌍한 주의 종입니다.’ 목사가 교회와 성도밖에 모르는 것을 뭐라 할 수 있겠는가. 단지 가정에 대해서는 너무 무관심한 것이 야속했다.



  ‘섭섭함’은 관계가 악화되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오랫동안 잘 지내온 사이라도 작고 사소한 일이라도 한 편이 ‘섭섭’이라는 감정을 느끼면, 둘 사이에 틈이 생기고 그 틈은 깊은 골이 생기기도 한다. 남편은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섭섭하게 했는가. 내 마음이 상했다는 걸 나름대로 표현을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강도가 너무 약했던 건지 그가 너무 자기 일에 매몰된 탓인지, 남편은 변함없이 자기 페이스를 유지했다.

 나도 그를 섭섭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밥도 주기 싫고 얼굴도 마주하기 싫고, 한 집에서 숨을 쉬기도 싫다. 내가 잘하는 건 ‘잘 참는 거’ 하나뿐인데, 이제 더 이상 못 참겠다. '이게 벌써 몇 년 째야.’ 남편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었다.

 

 남편은 집 안에서 자신의 역할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어차피 할 수 없어서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똥 멍청이가 되도록 혹사당한 것도, 가정에서 자기 역할을 등한시한 남편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 이제 그가 하나도 불쌍하지 않다. 나만 불쌍하다. 흐흐흐흐흑. 남편아, 언제까지 나를 섭섭하게만 할 테냐.


 내가 너무 오래 봐줬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제 더는 이렇게 살고 싶지가 않았다. ‘당신은 당신 길 가시고, 나는 내 길 가는 게 좋겠소.’ 딱 부러지게 말하자. 나는 험악한 사람이 아니니까, 최대한 매너 있고 젠틀하게 마무리해야지. 자존심 상하니까 울지는 않으리라. 그래 꼭 그렇게 하자!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없는 시간, 남편을 소환해 준비한 멘트를 했다. 나는 너무 울어서 숨도 잘 못 쉬었다. 남편이 내 마음을 돌이켜보려고 여러 가지 말들을 했지만, 그는 역시 문제의 핵심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어떡하지? 봐줄까 말까(나는 글렀다)?


 울고 불고 속이 다 뒤집히고 얻은 결론은, 남편은 내가 의지할 대상이 전혀 못 된다는 것이었다. 그도(나처럼) 무능한 1인일 뿐이었다.

 그래, 하나님만이 나를 도우실 수 있구나. 남편은 그저 사랑하라고 내 곁에 두신 사람이었어. 이제부터는 헷갈리지 않으리. 하나님을 의지하고 남편을 사랑하며 사는 게 맞는 거야. 이렇게 정리를 하고 나니, 남편과 정리할 필요가 없어졌다.

 여보님, 앞으로는 그대에게 사랑만 주겠습니다. 같이 사는 동안 서로에게 허튼 기대하지 말고, 우리 후회 없이 사랑만 합시다.



이미지 출처 :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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