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확행 독후감 2#희곡 <로봇: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_카렐 차페크
희곡 <로봇: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_독후감:
‘로봇’이라는 단어가 이 작품에서 시작되었다는 소개 글을 읽고, 로봇에 대한 발상은 어떻게 시작되었을지 궁금한 마음에서 책장을 펼쳤다. 처음에는 등장인물 이름이 헷갈려서 등장인물 소개 페이지로 몇 번 되돌아가야 했지만 이내 극장에서 한 편의 연극을 본 것처럼 푹 빠져들었다.
작품에서는 로봇이 인간을 대신하여 노동하기 시작하면서 그 변화로 인간은 도태되고 만다.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인간은 편안히 휴식을 누리는 것에 안주하기보다는 로봇을 제어하는 능력을 키웠다면 도태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로봇의 무한한 능력을 제어할 만한 능력 혹은 마땅한 장치가 없었다. 로봇을 생산하는 공식(로숨의 제조 방식)만이 로봇을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로 제시되지만 이마저 헬레나가 태워버리면서 인간은 로봇에게 져버리고 만다. 만약 헬레나가 그 원고를 태워버리지 않아서 그 원고를 로봇에게 넘겨주어 협상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로봇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를 로봇에게 넘겨준 이상 인간은 로봇을 제어할 수 없으므로 언젠가는 도태되었을 것이다.
로봇이 만들어지기 전 인간은 노동과 그에 따른 고통으로 그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봇이 만들어지고, 로봇이 노동하기 시작하면서 그 정체성을 잃어버린다. 그런데 노동형 로봇은 과거의 인간처럼 노동하지만 노동했던 인간과 다르다. 힘든 일을 해도 인간과 달리 그에 따른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통은 물론이고 쾌락 역시 즐길 수 없다. 작품에서는 인간이 노동을 하면 고통(혹은 근심)을 느낀다고 하였지만 노동을 하면서 고통 외에도 쾌락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TV 프로그램 <생활의 달인>에서 우리는 단지 한 가지 일을 오랜 기간 동안 성실히 하여 일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한 사람을 ‘달인’이라고 칭하지 않는다. 달인은 그 일을 오랫동안 성실히 하면서 일의 효율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일을 즐기고 있다. 달인을 보며 인간은 노동에 따른 쾌락 역시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전에 응시했던 인적성 검사 문항 중 ‘나는 1억이 생겨도 일을 할 것이다.’라는 문항에 적극 동의하며 ‘YES’에 체크했던 기억이 난다. 평소 나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노동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자기소개를 할 때도 빠지기 힘든 요소가 직업이다. 이렇게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로 나의 정체성이 규정된다. 다만 인간의 정체성은 노동으로 규정할 수 있지만 다른 인간과 차별화되는 나만의 정체성을 구현하는 것은 ‘그 노동에 따른 여러 감정(고통, 쾌락 등)과 생각’이다. 즉, 상대방이 나와 같은 일을 할지라도 그 일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따라 나와 다른 사람이 되고, 나만의 정체성이 생기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책은 로봇이 보편화되었을 때 인간에게 필요한 능력, 인간과 로봇의 차이, 인간의 정체성 등에 대해 고민할 수 있었던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