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도 험난한 '약 처방' 프로젝트
남편과의 오랜 대화를 통해 결국 adhd를 자각했다 하더라도, 그 다음 단계는 또다른 난관이다. 사실 늘 ‘약을 먹어볼까?’하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궁금하기도 했다. 과연 약을 먹으면 뭔가 변화가 있을까? 남편 말마따나 ‘삶의 질이 좋아질’수 있을 것인가? 아 궁금하다 궁금해. 남편 앞에선 ‘필요없어! 잘 살고 있어!’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미칠 듯이 궁금하다. 딱 한 알만 먹어봤으면 좋겠는데. 사람들은 ‘남편이 정신과 의산데 처방해달라고 해!’ 라든가 ‘한 알만 갖다달라고 해!’ 라고 하지만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다. 이곳 미국에서 처방전 없이 함부로 가족에게 약을 처방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니지, 미국이건 어디건 바늘로 찔러도 융통성 한 방울 안 나오는 우리 남편같은 의사에게는 하늘이 두쪽 나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도 애초부터 그런 건 기대도 하지 않았다.
친한 언니는 아들내미가 adhd약을 먹었기에 집에 약이 있었다.
한 알 줘 봐?
라고 내게 묻는다. 순간 엄청나게 혹한다. 그래 몇 알만 받아서 먹어볼까?
하지만 그 또한 말도 안되는 소리다. 나도 나름 정신과의사 아내 노릇 애인노릇 합쳐 도합 근 20년차다. 세상에 adhd만 해도 약 종류가 얼만데 괜히 아무거나 먹었다가 부작용이라도 나면 큰일이다. 게다가 남편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그 잔소리를 어찌 감당하려고. ‘처방받지 않은 정신과 약을~’ 어쩌구 저쩌구.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아. 한 알 먹어보고 싶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지만 먹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험난하므로 먹지 말아야겠다.
그게 지금까지 나의 결론이었다.
그 ‘험난한 과정’이란 바로
1. 정신과 의사를 만나기 위해 예약을 잡는다.
2. 정신과 의사를 만나서 상담한다.
3. 그 과정에서 또 자가진단하고 체크해야 할 상당한 문서들이 있다.
4. 다시 정신과 의사를 만나서 이야기한다.
5. 진단을 받고 약을 처방받는다.
6. 약국에 가서 약을 받아온다.
무려 이 여섯 개의 과정을, 그것도 몇 달에 걸쳐 해야 한다. 그 중에 첫번째. 의사를 만나는 약속 자체가 일단 최고난이도의 난관이다. 정신과의사, 혹은 nurse practitioner를 찾아서 new patient 신환을 받는 곳을 찾아서 보험카드정보를 다 불러주고 예약잡고… (그것도 영어로!)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게 싫어서 아이들 병원 예약도 정말 맘먹고 한꺼번에 하는데 말이다. 생존에 직결되지 않은 나의 ADHD진료를 위해서 그 과정을 겪는다는 건 엄청난 결심을 필요로 한다. 말하자면 “ADHD환자가 정신과 의사를 만나는 길은, 바로 그 ADHD로 인하여 가장 험난하고 어려운 길” 이라는 것이다. 조직력 계획력 떨어지는 ADHD에겐 그 과정은 생각만으로도 버겁다. (그러나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에 있어서는 엄청난 조직력과 계획력을 발휘할 때도 있다. 그것이 아이러니)
<ADHD를 살짝 자각 -> 약이 궁금해지기 시작 -> 의사를 만남>
이 과정이 마치 집채만한 돌덩이를 하나씩 치워야 하는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마침내! 그 부담을 이겨내고, 시간을 들이고, 남편의 도움을 받아가며 나는 그 과정을 이겨내고! 돌덩이들을 치워내고! 의사를 만나고야 말았다.
<드디어. 만나다>
내가 만난 의사는 인도인 정신과 의사. 사실 제대로 의사에 대해 알아보지도 않고, 그의 경력이나 이력은 쳐다보지도 않고 시간이 되는 의사로 정해서 줌미팅을 잡았다. 솔직히 그 만남은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않았다. 이미 수년간 남편과 대화를 나눠왔지만, 나를 모르는 의사와의 객관적인 만남은 또다른 시각과 깨달음을 내게 주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 의사는 별로 내게, 아니 환자에게 관심이 없었다. 내가 시작을 잘못한 것이었을까? 상당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정신과 의사인 남편의 권고’로 대체했으니 말이다.
1) 의사와의 첫번째 만남. 생각보다 질문은 별로 없었고 나 역시 할 말이 많지 않았다. ‘ 이 의사는 내게 관심이 없나봐’라는 생각은 약간 불쾌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잘됐다 싶기도 했다. 어짜피 난 모든 의논을 남편과 하겠다는 생각이 있었고, 내게 필요한 건 그저 ADHD약! 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의사 또한 저 환자는 어짜피 남편이랑 의논하겠구나 싶었던 모양이다. 몇 개의 질문. 그리고 궁금한 것 있냐는 말과 함께 질문지를 작성해서 보내달라고 했다.
2) 나의 질문지 작성 과정
3) 의사와의 두번째 만남. 여기서는 거의 대화가 없었다. 내가 작성한 질문지를 본 의사는 일말의 의심 없이 그냥 내게 ‘약을 시작해 보겠냐’고 물었고, 나 역시 ‘그렇다’고 대답했다. 바로 내가 자주 가는 cvs로 처방전을 보내겠다 했고, 진료는 십분 안으로 끝났다.
<진료 후 남편과의 대화>
(나) 여보. 이 의사는 나한테 관심이 없나봐. 총 대화한 시간이 삼십분도 안돼. 이럴 수 있어?
(남편) 바쁘면 그럴 수도 있지. 한국의 의료현실을 생각하면 이건 긴 것일 수도 있어.
(나) 당신은 adhd 아이들을 볼 때 얼마나 진료해?
(남편) 나는 어린아이들을 보기 때문에, 아이들은 시간이 많이 걸려.
(나) 아이들은 이런 질문지로 알기 어렵겠네?
(남편) 질문지만 갖고 할 수가 없지. 아이들 행동을 잘 봐야지. 행동관찰이 중요해.
(나) 그럼 어른은 보통 adhd를 어떻게 판단하는데?
(남편) 어른이나 큰 아이들은 면담시간에 멀쩡해 보일 수 있어. 그럴 땐 history가 중요해. 가능하면 가까운 사람들의 관찰을 듣는 게 도움이 되지. 배우자. 형제. 자매. 부모의 이야기들. 대화, 질문지는 당연하고.
(나) 내가 받은 약은 리탈린이야. 5mg. 이 약 알아?
(남편) 자주 쓰는 약이야.
(나) 어떤 약인데?
(남편) 이건 short acting이야. 단기작용. 보통은 큰아이들이나 어른들에게는 long acting약을 쓰지. 그런데 처음 시작하는 거니깐 short acting으로 시작하는 걸 거야.
(나) 좋은 약이야?
(남편)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약 중에 하나지.
(나) short acting이라 하면 몇 시간이나 지속되는데?
(남편) 서너시간?
(나) 서너시간동안 나의 전두엽이 제대로 작동하는 거야?
(남편) 제대로 작동하게 돕는데, 그런지 안 그런지는 확인을 해 봐야지. 약의 용량이 맞는지 안 맞는지. 이 약이 당신에게 맞는지 안 맞는지.
(나) 안 맞으면 어떻게 되는데?
(남편) 부작용이 있지. 용량이 너무 낮으면 효과가 없어. 사실 당신이 처방받은 5mg은 애기들 용량이야.
(나) 애기들 용량인데도 나한테 효과가 있으면 나는 adhd가 확실한 거네?
(남편) 그거가지고 확실하다고 말하긴 좀 그렇고. 의사들은 그런식으로 생각하진 않아. 진단은 치료 이전에 내려지는 거거든. 하지만 효과가 있으면 당연히 좋지.
그렇게 나는 약 복용을 위한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드디어 내 손안에 작은 알약이 들어왔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