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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호수 Jan 24. 2023

5. 그럴 수도 있지

어떻게 매일 그럴 수가 있어!

하나.


이틀 전.

언니네 집으로 놀러가기로 한 날이었다. 딸아이가 학교에서 오면 갈 계획이었다. 분명히 오늘은 아이들 다 일찍 끝나는 날이라 12시 반이면 집에 와야 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아들녀석은 아까 왔는데. 갈 준비 다 해놓고 있는데 왜 안오지? 무슨 일이 생겼나? 갑자기 불안해진 마음에 학교에 전화라도 해야 하나 허둥지둥하며 캘린더를 뒤지던 중.


아. 이런. 오늘은 고등학교만 일찍 오고 중학교는 수업을 다 하는 날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분명 이 사실을 알고 며칠 전부터 열번도 더 '맞아. 중학교는 일찍 안 오지!'라고 되뇌었었는데 기억해야 할 순간이 오면 다시 원점. 다시 백지.

중요한 건 딸내미가 일찍 오는 줄 알고 아침에 도시락도 안 싸주었다는 것이었다. 허겁지겁 주방에 가서 확인하니 야물딱진 딸내미가 과일과 스낵으로 자기 도시락을 싸서 갔다.

엄마를 너무 잘 아는 딸내미.

아. 미안하다. 딸아.


둘.


딸아이가 오고 짐을 챙겨 뉴욕으로 출발했다.

세시간 반이 걸린다고 뜬다. 기름을 먼저 넣고 가야지. 집 앞에 있는 주유소에 가서 주유파이프를 꽂아놓았다.(여기는 다 셀프). 잠시 주유소마트에서 스낵을 하나 사고 오는데 어디선가 '딸깍' 소리가 들렸다. 내 차의 주유가 끝난 줄 알고 차로 돌아오자마자 보지도 않고 주유파이프를 뽑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콸콸콸!

아직도 끝나지 않은 주유 파이프를 뽑은 탓에 기름은 온 사방에 다 튀고 나의 옷과 신발과 온몸에 철철.

are you ok?

옆에 있던 사람들이 황당해하며 물었다.


아. 부끄러워.

그 상태로 얼른 다시 집에 와서 기름 냄새 지독히 나는 옷과 신발을 벗어두고 다 갈아입고 씻은 후 다시 뉴욕으로 향했다.

나중에 남편으로부터 전화.

"여보! 빨래 더미에다가 그 기름냄새나는 옷들을 다 올려놓고 가면 어떡해! 우리 옷들까지 냄새가 다 배서 아무리 돌려도 냄새가 안 빠져!'"






내가 가장 많이 하는 말 중에 하나는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이다. 늘 이런 일들이 벌어지지만 나 스스로 별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남편이 뭐라뭐라 하면 '아 뭐. 그럴 수도 있지' 스스로에게 아주 관대한 면죄부를 준다. 아 물론 남들에게도 나는 관대하다. 내가 늘 실수투성이이니까 남들의 실수에도 관대할 수밖에 없다. 형식이나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편이기도 하다. (얽매일 수가 없다. 자꾸 까먹고 놓치고 하니까!)


그런데 온통 기름 냄새 가득한 옷을 벗어던지고 뉴욕으로 가는 차를 운전해 가는 길.

마치 '유레카!'같은 깨달음이 오는 것이었다.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 (나) 여보. 나 뭔가 느낌이 와.

- (남편) 무슨 느낌?

- (나) 아무래도 나 adhd가 맞는 것 같아.

- (남편) 나더러 돌팔이라며.

- (나) 이건 당신이나 의사가 말한 것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의 성찰에 의한 거야. 그러니까 진짜 명의는 나 자신이지.

- (남편) 그렇다 치고. 왜? 무슨 깨달음이 왔는데?

- (나) 오늘 두 가지 사건에서 뭔가 느낌이 왔어. 지나 오늘 학교 오후수업 하는거 까먹은거 말야. 나는 왜 '기억해야지' '맞아. 이건 까먹지 말아야지' 해놓고 왜 다시 백지장이 되는가? 나는 지능이 모자란 것인가? 하지만 지능이 모자라다고 하기에는 너무 자존심이 상해.

- (남편) 계획을 세우고 조직을 하는 기능은 뇌의 전두엽에서 관장을 해. adhd는 측두엽이 아니라 전두엽의 장애야. IQ 테스트는 보통 측두엽에 관련된 기능을 많이 테스트하지. 그러니까 당신은 지능이 떨어지는 건 아냐. 내가 보기에 머리는 좋아. 다만 adhd가 있을 뿐.

- (나)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머리는 좋은데 왜 자꾸 까먹지? 그래서 adhd라고 인정하는게 낫겠어.

- (남편) 전두엽의 기능이 떨어지면 몇 분, 몇 시간 내에 해내야 하는 일들을 관장하는 시스템이 잘 안돌아가. 그러니까 자꾸 그렇게 놓치는 거지.


- (나) 그럼 또 하나. 내가 아까 주유소에서 확인도 하지 않고 '어디선가 나는 딸깍소리에' 당연히 '아 맞아. 다 주유가 되었구나' 라고 생각하고 파이프를 뽑은건 왜일까? 그것도 내가 머리가 나빠서인가?

- (남편) 잘 생각해봐. 중요한 건, 당신은 그때 '아 맞다 주유가 다 되었구나'라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을 거야.

보통 사람들은 먼저 화면을 보고 주유가 다 되었는지 확인을 하고 그 다음에 파이프를 뽑지. 아무리 딸깍 소리가 들렸다 하더라도. 보통은 결정을 내리기 전에 정보를 조직하고 취합을 하는 과정을 무의식적, 전의식적으로 거치는데, 이런 경우 당신은 정보취합을 하기 전에 행동이 우선되는 거지.    

- (나) 보통 사람들도, 아 딸깍소리가 났구나 하고 그냥 뽑지 않아?

- (남편) 난 한번도 그래본 적 없어

- (나) 그건 당신이 유난히 행동력이 느린 사람이라 그런거 아닐까?

- (남편) ...  아무튼간에 자신의 증상을 인지한다는 건 정말 훌륭한 일이야. 그런 면에서 매우 칭찬해. 본인이 자각을 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있거든.




 


나도 늘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예를 들어 하루에 해야 할 일과 내가 하고 사는 일이 백가지가 있다면 아흔 다섯 개의 일들은 별 문제가 없이 처리된다. 다섯 개 정도의 일에 약간의 차질이 생기고 두 개 정도의 일에 빵꾸가 나는 것이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자 남편은 '그런 거 맞아?''그보다 더 빵꾸가 나는 것 같은데?'라고 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의 방어기제는 늘


- 그럴 수도 있지.

- 남들은 실수 안하고 사나?

- 내 친구들 얘기 들어보면 자기도 다 그렇대.

- 당신도 지난번에 핸드폰 잃어버렸잖아!

- 사람이 너무 완벽하면 사람이 안 꼬여

- 괜찮아. 내가 한 나머지 일들을 봐. 나는 아흔다섯 가지의 일들을 잘 처리하며 살고 있잖아!


이런 것들이다.


그런데 '그럴 수도 있지'가 진짜. 매일. 날마다. 언제나. '그럴 수도 있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반복되는 '그럴 수도 있는' 작은 일들 틈에서 그럴 수 없는 일이 생겨나기도 하고, 스스로에게 무한 관대해져야 하는 일들이 반복되는 가운데 가족들이나 주변 지인들에게도 '나에게 계속 관대해달라'고 무한 요구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중요한 건 '빈도'와 '횟수'일 수 있겠다. 남들도 다 실수하면서 사는 건 맞다. 그런데, 그 횟수가 몇 번인가, 빈도가 얼마나 잦은가는 분명 다른 문제일 수도 있겠다. 아마 '나도 맨날 그래!'라고 말하는 친구들의 '맨날'과 나의 '맨날'은 사뭇 다를 테니. 나의 '맨날'은 정말 '맨날'이니까!


약을 먹은 이야기를 한다고 해놓고서 계속 다른 이야기만 하는 중이다.

약 먹은 이야기까지 가기에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날마다 할 이야기가 새롭게 추가되는 중이라서.

아. 이제 확실히 알 것 같다.

나는 일상이 adhd 였어.

이제는 일상을 넘어서 친구가 되어 가는 중이구나.

꿰뚫어보고 싶은 친구.

알고 싶은 친구.

남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은 친구.

보이지 않는 내 친구이자 동료.

그 이름은 ad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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