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않을 수 없으면 써라.
누구에게나 수필은 심적 나체다.
그 사람의 자연관, 그 사람의 습성, 취미, 그 사람의 지식과 이상, 이런 모든 '그 사람의 것'이 직접 재료가 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 이태준 '문장강화' 중에서
꿈의도서관에서 하는 '안녕 나의 에세이' 클럽이 벌써 4기에 오면서 나는 참으로 에세이와 친해졌다. 사실 첫 책 '안녕 나의 한옥집'을 쓸 때만 해도 내가 무슨 장르의 글을 쓰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정체성이 없었다. 그냥 글을 쓴 것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냥 내 안에 있는 것을 '꺼내놓은' 것이었다. '안녕 나의 한옥집'에 대해 누가 물을 때 내가 대답하는 말 중의 하나이다. 글을 써낸 것이 아니라 '그냥 내 안에 있던 것을 고스란히 꺼내놓은 것'이라고. 그 이후로 에세이 클럽을 4기에 걸쳐 이끌면서 나는 생각한다. 아. 나는 진짜 에세이를 썼구나! 내 안에 있는 것을 고스란히 꺼내놓은 것. 그 이상 에세이, 곧 수필의 정의를 잘 표현할 수는 없겠구나. 하고.
물론 학교에서 수업을 하면서 '수필'의 개성에 대해 설명하고, 수업하고, 지도한 이야기는 이미 앞에서 했다. 그런데 막상 내가 쓰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보통 글을 쓸 때 '나는 에세이를 쓸 거야!' 이렇게 작정을 하고 쓰지는 않지 않은가! 대신 '나는 그냥 내 이야기를 쓸 거야!'라고 말을 할 것이다. 그 글의 장르나 정의 따위가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사실. 독자들이 읽으면서 장르 공부할 것도 아니고.
하지만 막상 알고 글을 쓰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는 사실. 역시. 요즘 내가 깨닫는 것 중의 하나이다. 멋모르고 쓰는 것보다는 '알고' 쓰는 것. 이왕이면 공부도 좀 하고 쓰는 것. 그래서 좀 유명한 작가들의 책도 장르별로 읽어보고 도움도 받고 하는 것. 그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느끼는 중이다. 예를 들어 앞서 인용한 이태준의 문장강화에 나오는 표현은 내가 상당히 즐겨 인용하는 표현 중의 하나인데, 글을 쓸때 순간순간 문득문득 감동적으로 이 표현이 다가올 때가 있다.
이 글의 재료는 '나 자신'
나의 글은 나의 '심적 나체'를 보여주는 것.
이런 표현들에 갑자기 울컥하는 것은 무엇인지! (도대체 이 반응은 뭐지. 아시는 분.)
아마 그건 나의 에세이 동지들이자, 소중한 수강생이자 학생들이기도 했던 에세이클럽 1.2.3. 그리고 지금 4기의 글쟁이들이 던진 질문들 때문일 것이다.
- 이 글을 공개해도 될까요?
- 도대체 어디까지 이야기를 솔직하게 써야 할까요?
- 작가님은 글 쓰실 때 공개의 두려움은 없었나요?
- 우리 시댁식구들이 이 글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 다른 사람들이 저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 수필은 솔직한 글이라는데, 모든 이야기를 다 공개해야 할까요?
이런 질문. 이런 의문. 스스로에게 또는 서로에게 던지는 질문들.
굉장히 근본적이고 원점에 가까운.
'에세이. 수필을 쓴다는 것'의 정체성에 대한
이 질문들.
에세이클럽을 진행하면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글을 쓰는 순간 자신도 몰랐던 내 안의 내가 둑이 터지듯 밀려나오는 경험은 많은 이들이 해보았을 것이다. 일단 터진 둑의 물은 다시 가둘 수가 없다. 가두려면 그 이상의 고통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주위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가족, 시댁, 친척들의 이야기에 이리저리 흘끔흘끔 눈치를 봐가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지 않을 수 없는' 깊은 갈망을 느끼며 써내려가는 이들. 그들에게 누가 과연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터져나오려는 둑 안의 물을 어떻게 막을 수가 있을까! 글을 쓰고자 하는 마음. 글을 써서 감정을 해소하고, 글을 씀으로 감정을 승화시키고, 현실과 현재를 객관화하고 더 나은 삶을 꿈꾸는 것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권리이자 기쁨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 그냥 무조건 쓰세요.
- 다 공개하세요.
- 당신의 글 때문에 상처받을 이가 있어도 신경쓰지 마세요.
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그 어떤 사람이 말할 수 있을까.
물론 그 어느 작가는 이렇게 말했지만.
- 내 글로 인해 상처받을 사람이 있을까봐 망설여질 때, 작가들은 보통 '일단 쓴다' 라고.
그렇다고 나도 그럴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러던 중 어제 박완서 작가의 오래 전 에세이를 집어들었다. 우리 시대 최고의 소설가이자 최고의 에세이스트. 그 어떤 장르를 쓰던 확실히 '박완서화'하여 독자를 들었다놨다 하며, 그 깊이에 있어서 차마 따를 자 없는 우리의 박완서.
그녀는 늘 '6.25를 우려먹을 만큼 우려먹었다'고 말했다. 모든 글에 6.25의 흔적이 있고, 그걸 알면서도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게 자신에게 있어선 6.25라는 사건이라고. 왜그렇게 등단을 늦게 했냐는 질문에는 '40년의 세월이 몇백년은 된 것처럼 그 무게가 고단해서 늦었지만 도저히 쓰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는 그녀. 작가의 어깨 위의 세월은 얼마나 깊고 진했을까. 도저히 털어내지 않고는 살 수 없고, 증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지난 날의 무게. 그녀의 지난 날은 다양한 모습으로, 다양한 형태로 그녀를 옭죄었다.
6.25의 상흔. 오빠의 죽음. 비극적이게도 훗날에는 아들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안으로 삭이고 삭여도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상처라 쏟아낼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들. 그 가운데에는 그녀'어머니'에 대한 상처도 있다. 세대는 다르지만 각자의 세대에서 겪어낸 깊고도 깊은 6.25의 아픔과 '자식'과 '오빠'라는 이름의 한 사람을 잃은 공통의 슬픔을 가진 어머니와 박완서 작가. 그 둘이 가질 감정은 연대감일까 배척감일까.
박완서작가는 등단 후 자신의 집에 어머니가 오실 때마다 자기의 책을 다 뒤집어 놓았다고 한 걸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어머니가 자신의 책을 읽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뒤에도 어머니는 단 한번도 자신의 글이나 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신 적이 없고, 자신도 그렇다고 했다. 어쩌면 어디선가 어머니가 자신의 글을 읽으셨을지도 모르지만 (박완서작가의 글을 마주치지 않기가 더 어려웠을 듯!) 둘은 결코 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고.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닌가.
박완서 작가 글의 반 이상의 정체성이 바로 '어머니'인 것을.
심지어 '엄마의 말뚝'은 그녀의 대표작 중의 대표작이 아닌가.
어머니에 대한 글을 주구장창 쓰면서도, 어머니가 보지 않기를 바랐던 작가 박완서.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고 싶었던 박완서.
역시 그녀의 글을 보았을지도 모르지만, 절대 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던 박완서 작가의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박완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자식이라면 당연히 느낄 슬픔과 함께 홀가분함을 느꼈다.'고.
(어찌 그러지 아니하겠는가. 어머니는 그녀에게 있어서 살아있는 고향이자 피흘리는 상처였다. 고 표현했던 것을 이해한다.)
나는 여기에서 우리의 질문에 대한 답의 힌트를 얻었다.
대작가인 고 박완서님 역시 우리가 던진 질문을 수도 없이 해왔던 것이다. 몇십년의 세월 동안, 아니지 그 이전 상처를 안고 피흘리며 언젠가 '글을 쓰고 증언할' 날을 기다리던 수십년 전부터 그녀는 질문했을 것이다.
- 내가 이 글을 써도 될까
- 내 글로 인해 상처받을 사람이 있을까
- 그리고 그 사람이 나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자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는 아닐까.
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썼다.
쓰고 쓰고 또 썼다.
본인 말로 '그만 우려먹어도 될 만큼' 써냈다.
이젠 그만 증언해도 되겠다 싶을 때까지 썼다.
그로 인해서 안쓴 척 하고 있는 '딸'로서의 자신이 있었고,
못본 척 하고 있는 '어머니'가 있었다.
그 둘 사이에 이 이야기들은, 세상에 나와 제발로 걸어다니는 수많은 박완서님의 책들은
상처였을까 치유였을까.
우리는 알 수 없다. 그 답을 내리려고 말을 꺼낸 것도 아니다.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상처가 되었을 수도 있고, 그 과정 자체가 박완서 작가에게 치유의 과정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여기에서 그게 아니다.
그녀는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수많은 글, 수많은 소설, 수많은 에세이를 쓰면서 그녀는 '심적 나체'가 되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을 쓰지 않고서는 도저히 독자들 앞에, 그리고 글을 쓰는 자기 자신 앞에 '심적 나체'로 정직하게 나설 수가 없었다. 알맹이를 빼버린 수박껍질 따위를 누가 먹겠는가!
'글'이라는 것의 본질을 이해한다면 이 말을 이해할 것이다. 치유고 상처고 나발이고 간에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정직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심적 나체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고 박완서 작가의 고뇌를.
그리고 오늘 다시 그 질문을 던진다.
이 글에서 우리는 어디까지 솔직해져야 할까?
'솔직함'은 '정보의 공개'와는 다르다는 것을 기억하자.
나는 박완서 작가의 글을 수도 없이 읽었지만 그녀에 대해 모르는게 아는 것보다 더 많다. 그것도 훨씬. 훨씬 더 많이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상처의 중심, 그녀 마음 속의 알맹이는 아는 것 같다. 그녀가 내게 알려주고 전해주고 건네주었다.
아마 그녀는 전해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썼을 것이다.
정답은 의외로 간단할지도 모르겠다.
쓰지 않을 수 없으니.
써라.
쓰지 않을 수 없으니.
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