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계절
어릴 적에 난
세상에서 산이 보이지 않는 곳은 없다고 생각했다.
마당 가운데에서 빙빙 돌며 하늘 먼 곳을 바라볼 때
그 어디를 봐도 저 멀리엔 산이 있었다.
뾰족한 산. 완만한 능선이 몰려있는 산.
높은 산. 낮은 산.
그 어디든 산이 있었다.
나는 언제나 그 산 한가운데 있는 존재였다.
옛 왕조의 도읍의 정기가 서려있는
그 산들 한가운데
우리집 마당에서
나는 계절의 변화를 느꼈다.
한옥집의 봄은 꽃과 함께 시작한다.
지금도 잠이 많은 나는 아침에 이불을 뒤집어 쓰고 못 일어나던 어느 날.
아빠가 나를 번쩍 목마를 태워서 마당에 나가셨다.
그때 바라본 마당의 목련꽃, 진달래꽃, 개나리꽃.
그 향기까지 코끝에 맴돈다.
모란꽃이 휘들어지고
흰철쭉 황철쭉 붉은철쭉이
가득하던
마당 정원.
한옥집의 여름나기는 쉽지 않다.
정원 곳곳에 자리를 튼
강력한 모기들 때문이다.
언제나 온 몸에 주먹만한 모기자욱을 여러 개 남기고
하루 종일 벅벅 긁으며
그래도 좋다고 뛰어 다니곤 했다.
집 곳곳마다 모기장이 있었어도
소용이 없었다.
우리들은 놀러 다니기 바빴으니까.
대청마루에 누워서 앞뒤로 통하는 바람을 솔솔 맞으며
좋아하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한 권 들고 뒹굴대며
할머니의 다듬이질 소리를 듣고 있으면
잠이 솔솔 왔다.
그렇게 잠이 들면 누군가 와서
배에 얇은 모시이불을 덮어주었다.
여름의 백미는 언니들과 함께 하는
다라이 목욕이다.
그 때의 우리 욕조.
빨간 다라이 통
펌프질해서 가득 채운 물.
빨개벗고 그 안에 들어가면
세상 신이 난다.
온 마당에 물을 튀기며 놀고난 후
엄마가 만들어 주신 하얀 원피스를
셋이 맞춰입고 돌아다닌다.
언니들 뒤만 쫄쫄쫄.
한옥집의 절정은 가을이다.
감이 익어가는 계절.
내 기억속의 가을의 아빠는
지붕 위에 있다.
지붕 위의 휘돌아진 감을 따서 아래로 던져 주신다.
그러면 우리는 이리저리 그걸 받아보겠다고 뛰어다닌다.
그렇게 딴 감이 마당에 들통으로 가득이다.
좀 지나면
곶감이 되어서 대청 마루에
주렁주렁 알알이 맺힌다.
할머니가 먹지 말라고 하셔도
하나씩 간간히 빼먹는다.
뒷마당의 단풍나무도
가을이 되어야 그 정수를 맛볼 수 있다.
늦가을에 담는
노성민물게장은
어른들만 드시고
아이들은 병난다고 못 먹게 하신다.
그래서 더 먹고 싶다.
늦가을에 담그는 김장김치와 함께
아니. 초겨울이라 해야 하나.
한옥집의 가을은 저문다.
한옥집의 겨울은
고요하고도 따뜻하다.
아랫목은 뜨끈해지고
방 안에서는 캐롤송이 울려 퍼진다.
유치원에서의 행사 준비와
크리스마스, 설날을 앞둔 설렘에
곳곳에 들뜸이 번진다.
동네아이들이 와 눈싸움을 하고
만들다 만 눈사람이
여기저기 어줍잖게 서 있다.
장독대 위에 흰눈이 쌓인다.
그래도 매 식사 때 장독대를 열고
잘 익은 김장김치와
장들이 꺼내져
밥상 위에 얹힌다.
엿을 고고
땅콩강정을 하고
과줄도 만든다.
가을에 쟁여놓은 감도
겨울밤에 꺼내다 먹는다.
한옥집의 겨울은
맛있다.
고요하다.
고즈넉하다.
나무 가지 가지마다
흰 눈이 맺힌다.
* 이 글은 <안녕, 나의 한옥집>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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