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크리스마스는 바나나와 함께 왔다.

19. 크리스마스 이야기

by 밤호수

나의 크리스마스는
예수님도 아니고
산타할아버지고 아니고
바나나와
함께 왔다.

한옥집 처마 밑은 고드름이 줄줄이 열렸다.
짧은 고드름
두꺼운 고드름
심지어 당시 내 키만한 고드름까지
(믿거나 말거나)
고드름을 딱딱 따서
들고다니고 핥아먹기도 하면
얼마나 재밌었는지
장갑 낀 손으로 우수수~ 한꺼번에 뛰어가면서
고드름을 떨어뜨리기도 하고.

쨍 하니 추운 날에는
한옥집 군데군데 놓인 대야에는
살얼음이 끼고
장독대도 얼어붙었다.
하지만 방안은 얼마나 뜨끈뜨끈했는지!

그러나 우리가 기다리던 건 오직 하나.
하얀 눈이었다.
이왕이면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렸으면!
마르고 닳도록 듣고 듣던
똑순이의 캐롤에서는

창밖을 보라
창밖을 보라
흰눈이 내린다.
가 흘러나왔기에.
흰 눈이 왔으면 간절히 바랐다.

그 해의 크리스마스에는
감사하게도
흰 눈이 펑펑 내렸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에는
유치원에서 행사가 있었다.
‘갑순이와 갑돌이' 노래에 맞추어
친구 하나는
한복을 입고 춤을 추었고,
우리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천사 율동을 했다.
마지막에는 무섭게 생긴
산타할아버지가 수염을 달고 나타나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돌아온 한옥집 아랫목은
엉덩이가 데일 듯이 뜨끈거렸다.
문 밖은
찬 공기가 쨍했다.
똑순이의 캐롤은
지치지도 않는 듯 반복되었다.

큰언니는 잠을 자지 말자고 했다.
산타할아버지가 오실지도 모르고,
그 산타할아버지가 엄마일지도 모르니까
자기는 자지 않고 버티겠다고 했다.
나도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큰언니 말은 다 법이니까

하지만 너무 졸렸고,
캐롤은 달콤했고
밖에 끝없이 눈은 포근했고
방바닥은 따뜻했다.
나는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언니가 새벽까지 깨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별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미션에 실패한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이 밝았다.
어김없이 머리맡에는 선물이 놓여있었지만.
무엇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바.나.나.

1년에 한번
오직 크리스마스에만
산타할아버지가 갖다 주시는
바나나
세 자매 모두에게
설익은 바나나 하나씩.
아까워서 먹을 수 없었던
그 노랗고 달콤하고 떫었던
바나나 한 개.
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리고 오는 내내
나의 손에는 바나나 한 개가 떠날 줄 몰랐다.
한 입 먹고 자랑하고.
한 입 먹고 쳐다보고.
그렇게 사랑스럽던 바나나

나의 크리스마스는
바나나로 시작해서
바나나로 끝났다.
지금은 우리집 주방에 365일 송이째 있는
바나나
유년의 크리스마스
그리고

바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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