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한옥집 vs 서양식 주택
‘좋은 집'이란 뭘까.
올해 이곳 미국에서 생애 첫 집을 구입해야 하는 나는 최근 들어 어떤 집을 사야 하나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가족에게 맞는 집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집'의 정의까지 생각하게 되는 요즘이다.
오래 전,
지금으로부터 팔십여 년 전에,
나의 할아버지께서 한옥집을 처음 지으실 때,
‘공주에서 제일 좋은 집' 을 짓겠다 하고 지으신 집이 바로 이 한옥집이었다고 한다. 자재도 가장 좋은 것으로 정성을 들여 수원지 옆의 가장 좋은 나무를 하나하나 베어 오시고, 마당의 나무 하나하나도 아름다운 묘목으로. 그리하여 봄부터 이미 붉은 단풍나무까지 그 자태를 뽐내게 한 집이 바로 우리집이었다. 원님이 사시던 바로 앞의, 앵산공원을 뒤로 병풍처럼 두른 아름다운 곳.
그러나 도립병원의 장례식장과 시체보관실이 들어서면서 아무래도 ‘조금은 공포스러운' 곳이 되었고, 또 세월이 조금씩 지나면서 집의 문화도 변하기 시작했다.
요즘 TV프로그램 중에 ‘윤스테이'라는 프로그램을 나는 즐겨본다. 고즈넉한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과 평화로움에, 서양식 주방이나 욕실을 결합해 편안함을 추구한 숙소의 모습이 참 좋아 보인다. 전통가옥의 아름다움과 자연이 공존하기에 보는 이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거기에 윤여정을 필두로 연예인들이 나와서 부드럽고 다정하며 전문적으로 고객들을 접대하는 모습은 역시 우리 전통의 손님 접대의 따스함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요즘은 ‘우리것'의 아름다움을 찾지만, 얼마 전만 해도, 아니 서양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우리것은 구식, 촌스러움, 불편한 것으로 취급받던 때가 있었음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런 트렌드는 약 4~50년 전 나 어릴 적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때 즈음,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한옥집으로부터 '공주에서 제일 좋은 집' 타이틀을 가져간 집들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서도 단연 짙은 적색 벽돌의 3층집이 당시 그리 여겨지고 있었다.
2층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작은 나의눈에는 적어도 3~4층은 되어 보였고, 겉은 담으로 둘러싸여 그 위용은 더 높아보였다. 제민천을 통하지 않고 학교에서 집에 올 때면 그 집을 거쳐 왔다. 누군가가 말해 준 ‘공주에서 제일 좋은 집'인 그 집은 무척 신기했다. 나에겐 ‘한옥집'은 편안하고 일상적인 것. 서양식 양옥은 신기하고 일상적이지 않은 존재였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인가. 그 집 안에 들어갈 일이 생겼다.
사실 지금도 이게 꿈인지 실제인지 잘 모르겠다. 분명 그 집에 들어가 본 적이 한 번인가 있었다. 왜였는지 잘 기억도 안나는데, 그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아빠가 말씀하셨고, 어찌된 영문인지 한 두시간을 거기에서 있었다.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집 안을, 계단을 , 2층을 구경하고 살금살금 오갔다. 집은 조용했고, 널찍했다. 특별할 건 없었지만, 고급스러웠다. 갈색 타일같은 마룻바닥의 느낌이 좋아 맨발로 타일의 느낌을 즐겼다. 특히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서서 내다보는 창이 참 좋았다. 그러고보니 한옥집에서는 그런 '널따란 창문'이 없었으니까 그게 신기했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
‘공주에서 제일 좋은 집'의
타이틀을 놓은 경쟁은 다시 불이 붙었다.
무녕왕릉으로 가는 길, 금성동 부근.
넓은 대지에 서양식 고급빌라가 들어섰고, 그 뒤로는 진짜 서양식 정원을 가진 단층주택이 두 채 생긴 것이다. 그 대부분은, 우리의 친구들 집이었고, 또 단층주택 가운데 하나는 우리 작은고모의 집이기도 했다. 그곳은 새로운 세계였고, 동경의 세계였다. 그 집들에 사는 아이들의 세계는 같은 공주에 살지만 같은 세계가 아니었다.
그 중 작은고모네 집은
지금 생각해도 한숨이 날 정도로 좋은 집이었다.
잔디를 깐 널따란 마당과 고급스러운 단층의 단독주택. 미국잡지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세련된 스타일.
역시 세련되고 지적인 우리 작은 고모와 그 집은 정말 잘 어울렸다. 사촌 오빠 두 명 역시 집에 어울리게 언제나 최첨단 컴퓨터와 게임기를 가지고 있었고, ‘패크맨'이라는 게임을 처음 접한 것도 그 집이었다. (나에겐 거의 순서가 돌아오지 않았지만) 나의 할머니를 닮아 깔끔하기 그지 없으신 고모는 그 멋진 집을 언제나 깨끗하고 아름답게 꾸미셨다. 말 그대로 그곳은 새.로.운. 세계였다. 사촌오빠들이 나랑 나이가 달라서, 난 별로 그 집에 갈 일도 없었고, 가서 놀 일도 없다는 게 늘 슬펐다. 오빠와 나이가 같은 큰언니만 주구장창 그 집에 가곤 했으니까. (여왕벌 큰언니의 인생과 이미 불공평했다.)
고모네 집 외에도 그 동네에 살던 친구들의 집에 가면, 미국에서, 서울에서 들여온 신기한 것들이 가득했다. 오븐에 쵸콜렛 케잌을 구워먹었고, 우유에 쵸코시럽을 타 먹었다. (이런 게 있다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던 나였다!) 거실에는 좌식소파가 있었고, 그 아이들의 방에는 당연히 침대가 있었다. 침대. 얼마나 사근거리고 포근한 느낌인가! 명랑소설의 기숙사에나 나오는!
나는 그 집들에 놀러가는 게 좋았다.
어느 날엔 친구에게 가서
- 우리 엄마가 나 너네집 가서 놀아도 된대.
라고 말했던 기억도 난다.
초대도 안받았는데!
얼마나 그 집에 가고 싶었으면!
고모네 집과 담을 맞대고 있던,
또다른 ‘공주에서 제일 좋은집'을 이야기하자면.
이곳은 우리 고모네와 달리 우리집처럼 딸만 셋인 집이라 또다른 신세계였다. 아들만 있어 정갈하고 고급스러웠던 우리 고모네와는 분위기가 완전 달랐다. 온갖 샤방샤방하고, 예쁘고 공주같은 것들이 가득했던 그 집. (진실과 상관없이 나의 모든 것이 나의 느낌상) 몇 번 가보진 않았지만 그 느낌은 생생하다.
거기에 화룡정점이었던 생일파티 이야기를 하자면.
‘공주에서 제일 좋은 집' 중 하나의
딸들의 생일파티 이야기이다.
우리집 생일파티와는 완전 대조적이었던.
우리집에서 생일파티가 열리면, 솜씨좋은 엄마와 할머니는 맛있는 음식들을 해주셨다. 고기와 부침개. 그리고 핵심은 엄마표 ‘잔치국수'. 우리집 잔치국수는 정말정말 맛있었는데, 어린 나도 세그릇은 거뜬히 해치울 정도였으니까. 남자애들은 몇 그릇씩 ‘더 주세요!’를 외치곤 했던 엄마표 생일상. 그러고나면 정원에서, 공터에서 ‘우리집에 왜 왔니’ 놀이를 하며 신나게 놀던 생일파티.
그와 완전 반대였던
‘공주에서 제일 좋은 집' 친구들의 생일파티란!
일단 정원에 친구들이 도착하면, 서울에서나 살 수 있음직한 샬랄라 드레스를 입은 친구가 등장하고, 그 아이의 생일상엔 잔치국수나 부침개같은 건 없다. 대신, 칵테일안주처럼 꼬치에 끼운 과일과 메추리알. 쵸콜렛 등. 모든 게 미국에서 왔을 것 같은 스타일이랄까. 미국엔 가본적도 없지만.
지금은 엄마가 해주신 생일파티가 얼마나 소중하고 멋진 것이었는지 알지만, 그 때는 ‘그쪽 세계의 파티'가 너무 신기해서, 부럽기 그지 없었다. 모든 게 신기하고 꿈나라 같았다. TV만화 ‘‘꼬마숙녀 링'이나 ‘캔디캔디'에서 나올 것 같은 세계들이었다. 그런 날이면, 한옥집이 지루해 보였다. 낡고 초라해 보였다. 신발을 신고 나와, 뒷간에 가야 하거나, 목욕탕이 집 안에 없는 우리집은 재미가 없었다. 조금도 샤방샤방 하지가 않았다.
꿈속에서 나도 ‘공주에서 제일 좋은 집'에 사는 꿈을 꾸었다. 서울의 수입품코너나, 백화점에서나 구할 수 있는 것들이 가득한 집을, 침대가 있는 나의 방을 꿈꾸며 잠들었다.
그 당시 내 친구들과 우리는 모두 서양식 근사한 주택을 부러워했다. 하지만, 늘 한옥집을 자랑스러워하셨던 부모님의 태도가 나도 모르게 나의 집을 자랑스러워하게 했던 것 같다. 비록, 잔디가 깔린 정원이 없고, 신발을 신지 않고 갈 수 있는 화장실과 욕실은 없었지만. 근사한 서양식 싱크대 대신 아궁이와 가마솥이 있었던 부엌이었지만. 할아버지가 정성스레 지으신 한옥집은 나의 정신과 영혼에 장착된 뿌리깊은 자부심이자 자긍심이었다. 비록 서양식 주택을 꿈꾸며 잠들었을지라도.
만일 우리가 그 집에 계속 살면서 집을 가꾸고 단장하여, 현대식의 편안함을 도입하여 근사하게 유지했다면, 아마 지금 다시 한옥집은 ‘공주에서 제일 아름다운 집'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시간과 역사와 이야기를 간직한 집이 되어 지금은 더욱 멋드러진 집으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을지도.
그리하여 나는 다시 생각해 본다.
‘좋은 집'이란 무엇일까 하고 말이다.
사랑받는 집.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는 집.
그리하여 집을 아끼고 가족과 하나가 되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집.
그 이상 좋은 집이 있을까.
우리의 이야기가 있는 집이라면
그 어느 곳이든.
그 때 어린시절
‘공주에서 제일 좋은 집'에 사는 꿈을 꾸었듯이.
나는 오늘도
나의 ‘공주에서 제일 좋은 집' 아니,
‘세상에서 제일 좋은 집'을 꿈꾼다.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셨고
나의 아빠와 그 형제들이 사셨고
나와 나의 자매들이 어린 시절을 보낸
그 집.
공주에서 제일 좋은 집.
세상에서 제일 좋은 집.
나의 집.
나의 한옥집을 말이다.
*이 글은 <안녕, 나의 한옥집>으로 출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