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서기 by 서정윤
서울에 처음 전학을 온 나는.
익명성 속에 숨었다.
그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아무도 나를 모른다는 사실이
속상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짜릿했다.
그곳에서 나는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친구들과 버스를 타고 종로라는 곳에 나가 교보문고도 가 보고, 신당동에 가서 우리끼리 떡볶이도 먹어보았다. 그리고, '라디오'의 문화에도 들어갔다. 별밤을 처음 듣게 된 것도 그때였다.
만화책을 좋아하는 친구를 사귀어 만화방이라는 곳에도 가 보고, 'Eres Tu'같은 피아노악보를 구해서 친구랑 피아노와 노래를 맞춰보기도 했다. '팡세'라는 제목이 적힌, 제법 근사해 보이는 책을 읽었고, 곧 '다락방의 꽃들' 시리즈처럼 엄청난 로맨스소설에 폭 빠지기도 했다.
원수연, 한승원, 이은혜의 만화책들에 정신을 빠뜨리고 '르네상스'를 빌려 읽었다. 시험이 끝난 날, 언니와 함께 떡볶이와 순대를 사고, 이달의 '르네상스'를 빌려오는 것이 큰 기쁨이었다. 처음으로 라디오를 들으며 가수의 음반을 사기도 했다. 서태지의 1집을 사서 끝도 없이 들으며 눈물도 흘렸다.
진정 소녀다운 자유와 감성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 모두 그 때 즈음이었다.
공주에서는, 부모님의 이름(?)과 좁은 동네에 갇혀 가져보지 못했던 익명성의 자유와 사춘기를 나는 홀로, 자유롭게 서울에서 겪기 시작했다.
그것은 즐거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때 난,
감성과
눈물과
내 자신의 감정에 폭 빠져
즐겁기엔 너무도 심각했다.
서정윤의 시를 읽고 베꼈다.
친구들에게 쓰는 편지의 시작은 언제나 서정윤의 '홀로서기' 또는 이해인 수녀님의 '친구에게' 같은 시였다. 때론 책이나 만화에서 본 그럴듯한 문장들이기도 했다. '유안진'의 글귀. 만화 '인어공주를 위하여'에서 백장미가 대구를 떠나며 되뇌던 첫 독백. 이은혜 만화의 '블루'같은 작품들의 철학적이고도 십대스러운 문장들.
인생이 다 떨어져나갈 것 같은, 내 몸이 다 녹아내릴 것 같이 심각한 - 지금 생각하면 오글거려 이불킥하고 싶은 - 고민들이 편지들을 채우고 넘쳤다.
편지지를 고르는 것은 일생일대의 의식이었다.
처음 친구들과 돈암동을 다니기 시작했을 때 그곳의 '모닝글로리'와 '아트박스'를 사랑했는데, (물론 공주에서 처음 생긴 '아트박스'와 '바른손 팬시'를 감히 따라갈 순 없었지만!) 그곳에 가면 수많은 색과 디자인의 편지지 중에 고르는 것이 몹시 힘들었다. 그렇게 나에게 업혀온 편지지들은 엄산하여, 각자의 맞는 친구들에게 갈 길을 향했다.
그 중.
지금도 종종 생각나는,
아니 떠오르는 것이 있다.
바로.
날고 싶은 자작나무.
편지지 오른쪽 아래에 박혀있는 로고.
'날고 싶은 자작나무'는
소녀였던 나를 슬프게 했고, 꿈꾸게 했다.
'자작나무'가 무엇인지
나는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찾아보려고 한 적도 없다.
자작나무는 자작나무.
날고 싶은 자작나무.
그 자체로 충분하니까.
은빛, 갈색빛, 파스텔빛의 자작나무 로고.
그리고
날고 싶은 자작나무.
그 이름과 나무그림을 볼 때마다 나는 왠지 슬퍼졌다.
날고 싶지만 날 수 없는 자작나무의 마음이 꼭 나 같았고, 우리들 같았다. 그러나 날지 못해도 그 자체로 이미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자작나무가, 그 사실을 자기만 모르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마음이 너무도 말랑말랑해지고 아련해져서, 어디론가 가고 싶었다. 다섯 손가락의 '노란 풍선'을 타고 날아가야 할 것 같았고, 서태지의 '내 모든 것' (내가 1집에서 제일 좋아하던) 노래처럼 내 모든 것을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막 바쳐야 할 것 같았다. 현실에 뿌리를 박고 이렇게 서 있기엔 마음이 너무 쓰라렸고, 현실은 너무 가혹하고, 고독은 진했다.
그 마음을 담아 나는 편지를 쓰고, 시를 적었다.
인생의 모든 아픔이 그 편지지 위에 있는 것 같았다.
세상의 온갖 아픔과,
세상의 온갖 서정과,
세사의 온갖 과장된 감정들이
편지지에 차고 넘쳐 흘렀다.
편지 속의 나는,
일기장 속의 나는,
'하이네'의 시처럼 서정적이었고,
한승원의 만화 주인공처럼 과장되었고,
'인어공주를 위하여'의 푸르매와 이슬비 같은 사랑을 꿈꾸었다.
지금도.
날고 싶은 자작나무.
를 떠올리면 나는 그때로 돌아가곤 한다.
마흔의 내가 이해해 주기 어려운
열 다섯의 나를
열 다섯의 감성을
어렴풋이 만난다.
그리고 묻는다.
넌 아직도 꿈을 꾸냐고.
넌 아직도 그리 써내려가고 싶은 이야기가 많냐고.
그리고 넌 아직도.
날고 싶냐고.
아직도 날고 싶은
아름다운 자작나무냐고.
...
오랜만에 그때의 나로 돌아가
서정윤의 '홀로서기'를 적어본다.
마지막 문장
'또다시 나는 쓰러져 있었다'를 적으며
꼭 쓰러져야 할 것만 같던 그 때의 나로 잠시 돌아가.
홀로서기 2.
서정윤
홀로 선다는 건
가슴을 치며 우는 것보다
더 어렵지만
자신을 옭아맨 동아줄,
그 아득한 끝에서 대롱이며
그래도 멀리,
멀리 하늘을 우러르는
이 작은 가슴.
누군가를 열심히 갈구해도
아무도
나의 가슴을 채워줄 수 없고
결국은
홀로 살아간다는 걸
한겨울의 눈발처럼 만났을 때
나는
또다시 쓰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