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보라색 형광펜과 함께 시작된 생활
이상은 ‘언젠가는'
듀스 ‘나를 돌아봐
어제 한국시간으로 토요일.
한 동창의 결혼식이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북극곰같이 하얗고 둠직한 외모에 성격은 차분해 보였지만, 그 포스만으로도 남자아이들이 줄곧 ‘형님~’ 한술 더 떠서 당대 최고의 미남배우 장동건을 들먹여 반어법으로 ‘동건이 형님~’이라고 조폭 흉내를 내게 만들던 아이였다. 지금도 그 아이를 떠올리면 북극곰이 생각난다. 그 아이도 이제 늦장가를 가는 모양이다. 하나씩 다들 시집 장가를 가고, 또 누군가는 홀로 자신의 삶을 일구고 있겠지.
코로나 시국이어서 누굴 초대할 만한 사정이 아니겠지만,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도 떠들썩하니 많은 아이들이 모였으려나. 이제는 저마다 살기 바쁘고 제 코가 석자인 40대 초반. 늦장가 가는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여 전처럼 천진난만한 웃음들을 교환하기엔 삶의 무게들이 너무 무거운 나이일까. 그들의 장난끼 어린 웃음들을 기억하는 나는 괜히 서럽다. 가장의 무게, 삶의 무게, 사회의 무게가 몹시도 고단할 그들의 40대. 나의 40대. 우리의 40대가.
다시 93년.
입학 전 내어준 숙제를 테스트하는 시험이 곧 치러질 것이었다. 우리는 그 시험을 위해 한달여동안 친구들끼리 몰려다니며 공부를 했다.
시험으로 통과된 자.
시험으로 평가받고.
시험으로 살아갈 것이니.
시험은 이제 우리의 인생일 것이었다.
적어도 1000일이 족히 넘을 날들 동안은.
이찬승 vocabulary는 제일 앞장. Aboard. Abroad. abandon만 몇 백번 외우고 A에서 제대로 진도가 나가질 않았고, 수학은 원래 싫어했고 정석은 친하지 않았으며, 한국문학작품 독후감은 마지막까지 미루고 미루고 미루었다.
외고 준비를 위해 다니고 있던 학원에서 진단시험 준비를 돕겠다며 영어 단어와 수학 프린트 몇 장을 풀게 했다. 학교에서 숙제로 내어준 정석을 진작에 포기한 나는 학원숙제나 하자는 마음으로 나눠준 두어장의 프린트물을 열심히 풀었다. 내가 무척 열심히 한 걸 기억해 보니 많진 않았던 것 같다. 기껏해야 두세장.
거기에 진단고사를 보고 숙제를 걷는 전날 밤. 학원 친구 둘과 모여 밤새 독후감을 썼다. 사십여편의 한국 소설. 읽지도 않은 그 소설들을 다 펴놓고 대충 내용을 짜깁기 하고 서로 쓴 내용을 바꿔쓰며 어떻게든 40여편의 독후감을 밤을 새고 완성을 했는데, 말 그대로 ‘숙제의 원 목적'을 완전히 상실한 ‘숙제 그대로의 숙제'였을 뿐. 손가락 운동만 한 셈이다.
그렇게 해서 학교에 간 날. 진단고사를 치렀다. 미리 알려준 범위 내에서 영어와 수학만 치르는 시험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가 받아든 시험지에는, 학원에서 미리 나누어준 프린트에서 거의 다. 말 그대로 ‘수학 답'까지 똑같은 문제들이 가득했다. 거의 반 이상이, 아니 70퍼센트 이상이 똑같았다. 와. 이게 웬 횡재! 다른 공부 안하고 학원 프린트물만 풀었던 나에겐 완전 물만난 고기였다. 문제를 어떻게 푸는지는 기억이 안 나도, 답은 기억이 나는 이 희한한 뇌 구조에 감사하며 나는 답을 적어내려갔다. 영 단어도 학원에서 찝어준 것들 그대로였다. 자신만만하게 시험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싱글벙글이었다.
와, 역시 우리 학원 선생님들은 대단해.
적중률 백프로야!
혼자서 입에 거품을 물고 떠들어댔다. 문제가 너무 어려워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울상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토록 기뻐했던 그날 시험의 적중률은 두고두고 나를 괴롭히는 원흉이 되었지만.
그 때는 그런 줄 알았다. 학원 선생님들이 ‘너무도’ 훌륭해서 정말 적중률이 높은 줄 알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학원과 우리 학교의 어딘가 숨어있을 유착관계의 범인을 의심하게 되었지만 그때는 너무나 순진했던 모양이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기뻐했으니까! 의심을 했더라면 조금은 찝찝했을 수도 있을까.
그런 의심이 합리적인 것이,
사실 우리가 입학하던 그 해 겨울.
내가 합격한 외고는 한차례 언론에 의해 난도질을 당하고 있었다. 잘못은 학교가 한 거니까, 언론은 난도질한 것이 아니라 터뜨릴 것을 터뜨린 것이겠다. 바로 ‘부정입시'에 관한 것이었다.
부정입학. 성적조작. 대학입시 비리
이런 불명예한 사건들이 도마에 오르면서 세간이 떠들썩했다. 돈으로 모든 걸 가져가려 한 소수의 학생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어쨌든 그 사건은 우리 학교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기에 충분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입학하기 전에 터져 조금은 앞으로는 달라지리라는 어른들의 다행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런 걸 생각해 볼 때, 학교선생님 한 둘이 학원에 시험지를 빼돌리는 정도의 일은 일도 아니었을 거라 생각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내가 받아들인 시험문제가 그토록 ‘답까지' 똑같을 수 있었겠는가!
그렇게 미리 진단고사를 치르고,
잘 기억나지 않는 입학식을 치르고, 우리는 첫 등교를 시작했다.
남자 34명. 여자 18명.
이 숫자가 내가 기억하는 첫 숫자이다.
두 분단이 남자. 한 분단이 여자.
내가 원래 1지망으로 썼던 불어과는 그 반대.
독일어과. 서어과는 남자가 압도적.
일단 숫자에서부터 압도적으로 열세였던 여자아이들의 수난시대는 이미 시작되었다. 외고는 각 과마다 독특한 분위기가 있는데, 불어과는 일단 숫자부터 여자들이 많아서 남자아이들이 기를 못펴고 살았다고 들었다. 또 적은 숫자의 남자아이들도 여성화(?) 되어 굉장히 조심스럽고 여성스럽게 놀더라. 는 후문들이 이어졌다.
독일어과는 우리과처럼 여자 숫자가 압도적으로 적었는데도 여자아이들이 씩씩해서, 오히려 남자아이들을 휘어잡더라고 했다.
우리 서어과는 전체적으로 다들 아이들이 순했다. 거기에 남자아이들은 ‘지나치게' 장난꾸러기들이었고, 여자아이들은 다들 소극적인 편이어서, 삼년 내내 기를 못 펴고 살았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런 시작은 처음부터였다.
불길한 시작.
거기에 한 술 더 떠
담임 선생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바로 J선생.
음산하리만큼 조용한 교실에 들어섰던 그녀의 첫 인상.
단발머리에 중고음 목소리. 얼굴에 끊임없이 미소는 띄고 있었지만, 왠지 쥐어짠 미소같아서 그 미소가 더욱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던 그녀. 자그마한 체구에 온 에너지가 응축되어 들어 있는 듯 했다. 에너지가 아니라 ‘짜증'이라고 해야 하나. 응축되어 있는 짜증의 에너지. 미소를 띄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서 나는 그런 ‘짜증'을 느꼈다.
자신이 학교에서 유일한 여자담임이라고 했다. ‘너희들은 행운인 줄 알아라'는 듯한 말투였다. 왜 그것이 행운일지는 전혀 모르겠었지만. 후에 알게 된것은, 학교에서 유일한 ‘여자 정교사'이기도 했다. 남자교사 판인, 외고의 현실에서 그것은 실제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마도 그리고 그녀는 미술교사였다.
아. 느낌이 안 좋았다. 난 정말 미술이랑 안 친하다. 이건 정말 느낌이 안 좋다. 이 느낌은 점점 더 사실로 드러났지만.
입학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우리가 서로에 대해 당연히 아무것도 모르던, 그저 몇 번의 수업과 반복되던 출석과, 급작스레 바뀐 환경으로 어지러운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담임 J는 한 장의 종이를 들고 교실에 들어왔다. 진단고사 성적표였다.
그리고 인정사정 없이 성적표를 1등부터 부르기 시작했다. 역시. 첫인상이 틀리지 않았다. 미소를 띄고 우리를 ‘인격적으로 ‘ 대우해줄 것처럼 말했지만, 우린 이미 인격적인 개체가 아니었다. 이미 그녀가 들고 있는 한 장의 순위표 안에 우리의 가치는 그렇듯 줄세워지기 시작한 것. 그 어느 누구도 ‘인격적으로 ‘따위의 말로 평가받을 순 없었다. 거기에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바로 몇십년 동안 우리들의 공통된 트라우마가 된 ‘형광펜' 색깔이었다.
앞에서 10등까지는 노란색 형광펜.
뒤에서 10등은 보라색 형광펜.
아. 지금은 웃으며 이 이야기를 한다. 우리들은 만날 때마다 형광펜 색깔 이야기를 한다.
넌 노란색. 난 보라색. 난 그 중간쯤 어디의 형관펜 배제 구역.
만날 때마다 지금껏 몇 십년 동안 ,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몇 십년 동안 또 해댈 영원히 끝나지 않을 형광펜 스토리이지만, 그토록 춥고 차갑고 마음도 을씨년스럽던 93년 3월의 D외고 1학년 6반에서 경험한 형광펜의 그 날은 우리에게 웃음을 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