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호수 Oct 25. 2022

수필과 자동차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수필과 자동차>

영화를 보고 가난한 연인 사랑얘기에 눈물 흘리고

순정만화의 주인공처럼 되고파할 때도 있었지

이젠 그 사람의 자동차가 무엇인지 더 궁금하고

어느 곳에 사는지 더 중요하게 여기네


우리가 이제 없는 건 옛 친구만은 아닐 거야

더큰 것을 바래도 많은 꿈마저 잊고 살지

우리가 이제 잃은 건 작은 것만은 아닐꺼야

세월이 흘러갈수록 소중한 것을 잊고 살잖아


버스정류장 그 아이의 한 번 눈길에 잠을 설치고

여류작가의 수필 한 편에 설레어할 때도 있었지

이젠 그 사람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더 궁금하고

해외여행 가봤는지 중요하게 여기네  

(015B 수필과 자동차)




015B는 듀스, 솔리드, 김건모의 음악과 더불어 고등학교 시절 나의 정서안정에 큰 도움을 주었던 그룹이다. 객원 멤버인 윤종신의 목소리가 맡았던 서정성(h에게), 이장우가 맡았던 애절함(세월의 흔적 다 버리고), 신해철이 맡았던 발랄한 슬픔(난 그대만을), 메인 멤버인 정석원과 장호일의 다양한 음악적 세계와 함께 그들의 90년대 감성은 나의 고등학교 시절 감성과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다. 나는 맘껏 그들의 음악세계 안에서 좌절하고 절망하다가 그들의 음악과 함께 다시 희망을 가졌고, 맘껏 처절하다가 다시 깨어나기를 반복했었다. 밝은 노래는 밝은 노래대로, 슬픈 노래는 슬픈노래대로 그들의 색이 좋았고 그들만이 가진 애수어린 세계가 좋았다. 그 중에서 <수필과 자동차>는 ‘밝은 계열’에 속하는 멜로디를 지닌, 재미있는 제목의 3집의 수록곡이다. 


지금 보면 참 유치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한 2분법이 아닐 수 없다. 수필의 세계와 자동차의 세계라니. 자동차가 더이상 ‘사치품’이 아닌 지금 2020년대에 이 가사는 도저히 어필하기 힘든 어휘 선택이 가득하다. <수필과 BMW> 혹은 <수필과 포르셰>라고 하면 조금 수긍이 갈까.  ‘해외여행 가봤는지’도 어색한 부분이다. 요즘은 해외여행보다 ‘제주도’가 더 힙한 시대이니까. 그러나 가사의 역사적 사회적 의미 변화에도 불구하고, 관통하는 메시지는 변하지 않았다. 결국은 2분법으로 나눌 수밖에 없는 가치와 관점의 양쪽에 있는 것들.

 

그 한쪽에 있는 것들이 바로 가사 속에서 <수필>이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가치들이다. 가난한 연인의 사랑얘기. 순정만화의 주인공. 버스정류장 그 아이의 눈길 한번. 옛 친구. 그리고 ‘여류시인의 수필 한 편’. 그런 작고 소중한 가치들. 

우리들에게는 그런 것들에 가슴설레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가슴 설렐 뿐 아니라, 그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가난한 연인이 되고(반드시 ‘가난’해야 했다.) 순정만화 속의 비극적인 주인공이 되고 싶었고(반드시 '비극적'이어야 했다.), 여류시인의 수필에 등장하는 세상의 허무함 속의 주인공이 되어 생을 빨리 마감하고 싶었다. 나에겐 서른도, 마흔도, 더더군다나 쉰이나 예순은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았고, ‘사랑하다 죽어버리고' 싶었다. ‘그’와 눈을 마주치는 짧은 순간이 크고 대단한 것들보다 훨씬 중요했고, 노래 가사 속 마음을 관통하는 단어 하나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계획보다 중요했다. 그런 것들이 아마 90년대 공일오비가 전하고 싶었던 ‘수필’의 가치일 것이었다. ‘에세이’라는 단어로 대치될 수 없는 수필이란 말이 주는 그 감성. 분위기. 2020년대가 되어도, 아마 3000년대가 되어도 존재할 가치들. 작고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들.


인생이란 것은, 삶이란 것은 결국 ‘수필’에서 ‘자동차’로, 그래 ‘BMW’로 가는 과정일까. 그게 당연한 수순이고, 자연스러운 길일까. 국민을 위한 정치를 부르짖으며 데모에서 온 몸을 던지던 학생운동가는 세월이 흘러 정치권에 들어가 일신의 영달만을 보장받으려 하고, ‘가난한 사랑노래’를 속삭이던 연인은 부와 권력을 위해 더이상 사랑을 속삭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가치를 위해 죽고 싶다던 그때 그 친구는 이제 회사의 임원이 되어 더이상 시를 읊지 않는다. 그때 그 작고 소중한 가치들은, ‘수필’의 세계는 왜 세월과 함께 사라지는 걸까. 왜 우리는 더 이상 여류작가의 수필 한편에 울고 웃지 않으며, 왜 더이상 눈빛 하나에 서글퍼지거나 기뻐지지 않는 걸까. ‘나이’와 ‘세월’이라는 것은 반짝이던 감정마저 마모시키고 살아 움직이던 가치마저 뭉툭하게 만드는 걸까. 

오랜만에 공일오비의 노래 <수필과 자동차>를 생각에 잠긴다. 나는 아직도 ‘수필’을 사랑하는 소녀이고 싶지만 사실 나의 삶은 ‘자동차’가 잠식하고 있다는 생각에 슬프고 서글퍼진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스스로의 생각에 또 한번 서글퍼진다. 그리고 나의 글도 혹시 ‘자동차’의 가치에 매몰당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해진다.

 

오늘 나와 함께 에세이를 써온 <에세이클럽 3기>의 수강생 중 두 분이 동서문학상 수필부문에 입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뛸 듯이 기쁘고 눈물이 났다. 서로를 응원하고 북돋우며 글을 써온 지난 두세달의 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중 한 분의 수상작 제목은 ‘글쓰기가 나에게 던지는 작은 질문들’이었다. 그녀는 글 속에서 '공모전을 향한, 공모전을 위한 글쓰기, 수상의 달콤함'을 알고 그를 위한 글쓰기를 하시는 분들을 보면서 ‘씁쓸하다’는 말을 했다. 그러면서 ‘무엇을 위해 나는 글을 쓰는가’라고 질문하고 있었다. 그런 질문을 던진 글이 공모전에 입상을 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면서도 재밌다. 

그들이 받은 이 작고도 큰 수상 소식에 들뜨고 기쁘면서도 나는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는가’라는 생각을 다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또한 얼마 후 두번째 책 출간을 앞두고 있다. 수상 앞에서, 출간 앞에서 반드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이 주제. 우리는 무엇을 위해, 왜, 글을 쓰는가. 


이 세상에 <수필>과 <자동차>의 가치가 있다면, 글쓰기라는 세계에도 역시 양날의 가치가 있다. 17세기 프랑스의 시인 시라노 드 베르주락은 ‘달 여행기’라는 글에서 “달 지성체들의 삶에서는 ‘시가 돈’이라서 시를 잘 쓰는 사람이 부자”라는 상상을 썼다 한다. 그 재미나고 아름다운 상상에 황홀하다가도, 시가 곧 돈이고, 곧 권력이라면 과연 시는 예술이 될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글을 쓰고 책을 내는 것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명예 안에 속한 일이라면 과연 글을 쓰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첫 책을 내고 블로그에서 수많은 관심과 축하를 받았다. 한국에 가서는 연일 북토크와 많은 초대를 받아 좋은 시간을 보냈다. 나의 어머니는 농담처럼 진담인 듯 ‘책 하나 내고 너처럼 오도방정 떠는 작가를 본 적이 없다’고까지 하셨다. 


나에게도 파티는 끝났다. 스스로에게 말한다. 파티는 끝났다고. 글의 세계에도 ‘수필과 자동차’의 가치가 있다면, 수필의 길을 걸어가자. 내가 원하는 건 ‘글’인가, ‘관심’인가 ‘명예’인가. 분명 나는 ‘인정’받고 싶고, ‘공감’받고 싶다. 진정한 관심과, 진짜 공감을 받기 위해서는 위해서는 ‘자동차’가 아닌 ‘수필’의 세계, 내 잃어버린 가치들을 기억해야 한다. 나이가 들면서 자꾸만 더 가고 싶은, 공일오비가 말하는 '자동차'의 길을 바라보지 않고, ‘수필’의 가치를 좇을 때 나는 제대로 글을 써 나갈 수 있지 않을까. 남들이 어찌 바라보든 내가 인정할 수 있는 나만의 글. 읽어주는 이 적을지라도 내가 행복할 수 있고 누군가 한 사람을 진정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글.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작은 가치에 큰 의미를 두는 그런 글쟁이이고 싶다.

 

굳이 오늘 이 글을 쓰는 것은, 우리 에세이클럽의 큰 수상 앞에서 찬물을 끼얹으려거나, 나의 출간에 앞서서 들뜬 마음을 일부러 가라앉히려는 게 아닌, 우리가 가야 할 길고도 먼 길을 다시 한번 제대로 바라보려는 마음인 까닭이다. 그 길을 글벗들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가고싶은 마음이 가득한 까닭이다. 그리고, 공모전에 수상하지 못한 또다른 우리 에세이클럽의 글쟁이 벗들에게 오래오래 함께 가자고 다독이고픈 마음이 큰 까닭이다. 크고 화려한 길보다, 작고 소중한 가치들을 보고, 따르고, 글로 적고, 사랑하는 우리 글쟁이들이 되자고 그들에게,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다짐해 보는 까닭이다. 왜 글을 쓰는가. 에 대한 질문 앞에서 공일오비가 90년대에 노래한 '세월이 흘러갈수록 잊어버리는 작고 소중한 것' '여류 시인의 수필 한편'의 가치를 되새기고 싶은 그런 밤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iFsuV4fc_qc


<수필과 자동차>

영화를 보고 가난한 연인 사랑얘기에 눈물 흘리고

순정만화의 주인공처럼 되고파할 때도 있었지

이젠 그 사람의 자동차가 무엇인지 더 궁금하고

어느 곳에 사는지 더 중요하게 여기네


우리가 이제 없는 건 옛 친구만은 아닐 거야

더큰 것을 바래도 많은 꿈마저 잊고 살지

우리가 이제 잃은 건 작은 것만은 아닐꺼야

세월이 흘러갈수록 소중한 것을 잊고 살잖아


버스정류장 그 아이의 한 번 눈길에 잠을 설치고

여류작가의 수필 한 편에 설레어할 때도 있었지

이젠 그 사람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더 궁금하고

해외여행 가봤는지 중요하게 여기네  

(015B 수필과 자동차)


 



매거진의 이전글 그녀의 전자책 만들기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