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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짱니 Jun 21. 2024

나를 각성 시킨 그녀

기자님

그냥 쉽게 쓰면 안돼?


"주무관님, 이번 거는 진짜 고민이네요"


출근길. 00 기자에게 온 톡을 보고는 뜻하지 않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뭐든 취재할 주제만 좋다면, 만날 사람 섭외든 현장 취재 일정 조율이든 그 뒷 일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그런 기자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국내 대표 진보성향 신문사의 기자이다. 기자생활 족히 30년은 됐을법한 베테랑이다. 우리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소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이야기, 그러나 좀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여러 방면에서 노력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지난 2년간 봐온 대로라면 이번에도 역시 나는 좋은 주제 하나 제안하고, 잠시 현장에 나가 인사하고, 1주일 뒤 지면에 실린 기사만 확인해 상부에 보고하면 되는 거였다.


그런 그녀가 '고민'이라니. 큰일이 나도 아주 큰일이 난 거다.


허겁지겁 사무실에 도착해 바로 전화를 걸었다.

"기자님,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주무관님, 알려주신 내용을 좀 살펴봤는데요. 아무래도 현장 가서 사전 취재를 해야 할 거 같아요."


'아니, 이게 뭐 대단한 사건사고도 아니고, 그냥 동네 애들이 좀 드물게 의미 있는 활동하는 내용인데, 무슨 사전취재까지?' 속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듯 본업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아, 그러시구나. 그럼 제가 그쪽에 연락을 해볼게요"



보지 못한 것을 본 그녀


그렇게 성사된 현장 답사 겸 사전 취재날. 글 쓰는 어공 10년 만에 처음 겪는 상황인지라 불안함을 가득 안고 현장에 갔다. 진작에 도착한 기자는 시설 교사와 이미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내가 연결해 주고도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에 가만히 숨죽여 둘의 대화를 들었다.


시설 교사가 먼저 활동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사실 저희 활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권리에 대해서 다뤄요. 모든 과정에서 아이들이 중심이 되는데요.... 이게 참, 추상적이다 보니까... 교사인 저 역시 우리 활동을 정제된 말로 잘 전달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네요."


그러자 기자가 '바로 그 점'이라며 고민을 털어놓았다.


"제가 고민한 부분이 바로 그거예요.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보니까 제가 정말 조심스럽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뭐야, 겨우 그거였어? 아이들이 주인공인 거? 그래서 고민이었다고?'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고민이라면 지난 10년 동안 나는 수백 번을 했어야 했고, 그동안 만나온 수많은 기자들 역시 수백 번의 고민을 거듭했어야 취재현장에 올 수 있었을 테다. 특히나, 저출생 시대에 직면하면서 얼마나 많은 구청에서 너나없이 아이들 대상 사업에 열을 올리고 있는 상황인지를 고려한다면 말이다.


기자는 말을 이었다.

"아무리 전화나 자료로 설명을 들어도 저 역시 어른이잖아요, 고민 없이 제 그 시각을 그대로 담았다가 자칫 아이들 활동의 의미가 잘못 전달되거나, 행여나 아이들에게 상처가 될까 봐요"



각성의 순간


부연 설명을 듣는 순간, '아차!' 싶었다. 뭔가 단단한 둔기로 뒤통수가 아닌, 심장을 맞는 느낌이었다.  그리고는 아주 짧은 순간, 눈앞으로 그동안 내가 썼던 보도자료들이 후루룩 지나갔다.


나는 얼마나 많은 순간, 얼마나 많은 이들을 생각하지 않고 글을 썼던가. 그 글 안에는 어린이도, 주부도, 장애인도, 노인도 있었다. 아니, 실상 내가 쓴 보도자료에는 그들은 없었다. 그들을 지칭하는 단어만이 있을 뿐이었다.


본인이 쓰게 될 기사에 등장할 어린이들의 입장과 그들이 행여라도 받게 될 나쁜 시선, 의도치 않은 상처까지 생각하다니. 기자의 그 마음 자세에 나는 깊은 각성을 하게 되었다.


아무리 매일 일로 글을 쓴다지만, 너무나도 온전히 일로만 나의 글을 대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기자의 깊은 고민 덕분에 시설 교사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아이들의 활동을 설명했다. 그리고 기자는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활동과 관계된 다른 시설의 교사들을 또 만나고, 관련 학과 교수님과 전화 통화까지 하고 나서야 현장 취재를 시작하였다.


현장 취재 당일, 모든 행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들 곁에서 지켜본 기자는 그제야 마음 놓인 미소를 지으며 기사를 마무리하였다.


그렇게 무려 한 달이 걸린 취재는 멋진 기사가 되어 지면에 실렸다.


그리고 오늘 시설 교사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아이들이 무척 뿌듯해한다면서 조만간 아이들과 작게나마 축하 파티를 열기로 했다고. 덧붙여 자신들의 작은 활동에 관심 가져 주고, 아이들이 커서 나중이라도 기억할만한 추억거리 만들어주어 감사하다고. 그러나 취재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고.


나는 오늘 가슴이 처음으로 가득 차는 걸 느꼈다. 글 쓰는 어공으로 10년을 살면서도 처음이었다.


그저 나는 겉으로 보기에 예쁜 취재거리 하나를 찾아 기계적으로 보도자료로 썼을 뿐이었다. 그 예쁜 모습 뒤에 숨겨진 고민거리는 보지 못했다. 아니, 볼 생각조차 없었다. 이것은 내 글이 아니고, 내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나를 대신하여 고민하고, 그 글 안의 아이들을 보고, 그 모습 그대로 봐주려 노력해 준 기자 덕에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게 되었다.


오늘 하루만 이 가슴 벅참을 선물로 만끽하고, 내일부터는 그 자리에 '책임'을 깊게 새기려 한다. 내가 써야 할 글의 현상만 볼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안에 담긴 사람들까지 보도록. 그게 내 글을 책임지는 자세다.


나를 각성시켜 준 그녀,  기자'님'께 존경의 마음을 담아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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